“북한에 있는 아들이 중국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지난해 두 번이나 중국을 방문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죽기 전에 아들 얼굴 한번 보는 게 소원입니다. ”

평북 박천(박천) 출신의 김상국(김상국·73)씨. 김씨는 1·4후퇴 때 북에 남겨 둔 아내와 두살배기 아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접수 창구와 대한적십자사 등 대북 접촉이 가능한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다. 각종 민간센터에도 도움을 청했다. 95년 2월15일 설마하던 답장이 왔다.

“아내로부터 첫 편지를 받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50세가 된 아들은 함북 탄광으로 쫓겨가 있고, 아내 사진을 보니 나보다 더 늙고 병들어 보이고…. 밤새 목놓아 울었습니다. ”

그는 이 편지를 받은 후 ‘만나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한 민간단체에 중국에서의 만남을 주선하는 대가로 500만원을 낸 후 중국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중국 비자는 계속 연장이다.

‘죽기 전에 생사확인만이라도…’ 이산가족 상봉은 모든 실향민들의 최대 소망이다. 본지가 현대경제연구원-동화연구소와 공동실시한 실향민 의식조사에 따르면 ‘어느정도 부담이 되더라도 이산가족을 찾고싶다’(65.5%)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고싶다’(21.5%)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87%로 나타났다.

91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중국은 실향민들의 대북 접촉 창구였다. 북한을 왕래하며 무역하던 중국 조선족들을 통해 서신교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선족들을 중심으로 이산가족을 전문적으로 찾아주는 브로커까지 생겨났다.

조선족 브로커들은 서신교환에 30만∼50만원, 상봉까지는 최고 3000만원까지 요구한다. 실향민 사이에는 돈 없으면 가족 생사확인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20여개 단체가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상봉을 추진하고 있다. 행정자치부 산하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따르면, 97년까지 평균 100여명 정도였던 북한 주민 생사확인이 98년에는 377명으로 증가했다. 서신교환과 제3국 상봉도 98년에는 각각 469통, 108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공개되지 않는 접촉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미국과 일본 교포들의 북한 방문을 통해서도 생사확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재일동포 김모(71)씨는 “북측이 일본과 미국에 친척을 둔 경우, 외화벌이 차원에서 상봉을 묵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병선기자 bschung@chosun.com

실향민들의 이산가족 상봉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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