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살피며 연례행사인 한·미 을지연습과 을지 포커스렌즈 훈련을 축소하다 못해 이제 유명무실한 ‘종이 고양이’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정부가 과연 최소한의 안보 의식과 나라로서의 줏대를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정부가 6·15 선언을 의식해 훈련기간 중 실제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도상연습만 하고, 을지연습 역시 비상시 재난대비에 치중하기로 하는 등 행사규모와 성격을 예년과 달리 크게 변형시킨 것에 대해서는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우리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북한 ‘조평통’이 훈련개시 이틀 전인 지난 19일 “을지 포커스렌즈 연습을 강행하면 사태는 6·15 공동선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며 훈련중단을 요청하고 나선 뒤의 정부 대응을 보고서는 맥이 확 풀린다. 표면상으로는 “북측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우리 측은 훈련규모 축소 등 북한을 자극할 만한 요소는 배제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훈련내용을 다시 후퇴시키는 작업을 되풀이해 껍데기만 남기고 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훈련상황 순시계획을 취소하고 훈련 홍보자료도 배포하지 않기로 했으며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생략한 것 등이 그 예다. 이 때문에 정부 각 기관이 모든 일정을 비상사태에 맞춰 진행시켜야 할 을지연습 첫날인 21일 공무원들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음은 물론 ‘을지 국무회의’도 평상시 회의보다 30분 늦게 열려 새벽에 출근한 공무원들의 불평을 샀다고 한다.

조평통 대변인 성명 한 마디에 허겁지겁 놀라 한·미 간에 사전조율을 거쳐 확정한 연례훈련을 더욱 초라하게 퇴색시킬 바에는 그런 훈련은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으며 이 훈련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북한 측에 미리 설명하고 당당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답답하다. 만에 하나 정부가 “‘따귀 빼고 알맹이 빼고’ 하는 식으로 미리 알아서 훈련의 성격을 형식화시켰으므로 북 측이 그냥 넘어가 주겠지”하는 생각을 했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순진무구했다. 북 측은 매년 이 훈련에 대해 ‘북침책동’ 운운하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고, 1992년에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실로 남·북기본합의서를 휴지조각으로 만든 전례도 있다. 6·15 선언의 정신을 살려 남·북화해와 협력분위기를 일구어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양보할 것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 한·미 동맹관계에 직결된 문제 등이 바로 후자에 속한다. 을지연습은 우리의 재난대비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훈련이다. 북한도 그런 훈련을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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