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북에서 온 ‘손님’들이 돌아갔으니 기록을 위해서도 이것만은 분명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북한 이산가족들은 서울에서 3박4일 동안 체류하면서 이번 상봉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력으로 ‘물꼬’가 트인 것처럼 말해왔다. 물론 북한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 국민들 가운데 일부라도 그렇게 생각할 우려가 있다면 당연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난 30년간 이산의 상봉을 꾸준히 추진한 것은 우리 정부였고 그것을 막아온 것은 북한 당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72년 7·4공동성명 발표를 전후해 본격화된 남북 적십자사 접촉은 우리측의 ‘이산(이산)문제 우선해결’ 요구를 북한이 갖가지 구실을 붙여 무산시킨 ‘파기’의 연속이었다. 남북 적십자사는 71년 9월부터 모두 25차례의 예비회담과 7차례의 본회담을 통해 생사와 주소확인, 편지교환 등 이산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위한 5개항에 합의했으나 북한은 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회담을 파기했다.

그나마 85년에 한 차례 50명씩 서울과 평양에서 ‘단체상봉’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정부가 북한의 수재물자 지원을 흔쾌히 받아들인 데다, 북한과의 협상에서 이산문제의 제도적 해결이 당장은 어렵다는 판단에서 ‘시범사업’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범사업도 계속되지 못했다. 89년에 2차 고향방문단 교환에 합의했으나 북한이 ‘혁명가극’ 공연을 끝까지 고집해 무산되었다. 97년 7차 고위급 본회담에서는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에 합의했으나 ‘이인모 송환문제’로 결렬되었다. 북한은 98년4월 베이징 차관급회담에 앞선 사전접촉에서는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및 비료지원’을 병행논의키로 했으나 막상 회담이 열리자 선(선)비료지원을 요구해 회담 자체가 무산되었다.

이산가족문제에 대한 남북한의 시각차는 너무나 컸다. 우리는 순수한 ‘혈연의 문제’로 보고 있으나 북한은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해 보안법 폐지 등 ‘법률적, 사회적 조건’이 개선돼야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최근들어 북한은 ‘이산문제’를 경제지원을 받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상봉이 제도화되는 단계로까지 진척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다. 우리의 끈질긴 노력끝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이 ‘오로지 김정일의 은덕’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왜곡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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