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던 세월만큼 모두들 변했으나 그 만남의 기쁨은 당사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시동생을 만날 남쪽의 형수는 잊혀진 얼굴을 되살리기 위해 적십자사에서 보내준 근래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며 그 모습을 익혔다. 기억을 더듬어 그렇게 만난 이산가족들은 곧 이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북쪽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남쪽의 아버지…. 만나는 이들도, 보는 이들도 눈시울을 붉혀주는 장면이었다.
남북 정상의 6·15선언 후 가진 첫 이산가족 상봉은 이렇게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 200명만이 이산가족이 아닌 것이다. 10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산가족 가운데 60세 이상 이산 1세대는 69만명, 앞으로 생존기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70세 이상은 26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측의 이산가족 집계는 알 수 없으나 남측의 월남 또는 월북한 이들 이산가족은 모두 상대가 있을 것이니 최소한 이들의 생이별의 한(한)도 풀어줘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5년 9월 어렵게 이루어졌던 이산가족 첫 상봉은 고향방문단 이름으로 남북 각 50명씩이었다. 1000만 이산가족 가운데 이들 300명만이 짧은 기간이나마 상봉의 행운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상봉행사는 정치적 이유로 단 1회에 그쳤었고 15년 만에 이산가족의 재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산가족들의 한을 보다 폭넓게 풀어주기 위해서는 직접 만남만이 아니라 상설 면회소 설치와 서신왕래 등 남북한 통신허용이 시급하다. 우선 이산가족들의 생사여부만이라도 확인해주고 이들이 서로 사진과 서신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혈육의 강제적 단절은 어떠한 정치적 이유나 이데올로기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들의 작은 소망부터 풀어가는 것이 통일의 첫 발이 될 것이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 직항로를 활용하여 성사시킨 것은 평가할 만한 결단이다. 남북 지도자들이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는 이런 자세를 발전시킨다면 우리의 앞날은 보다 밝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