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대북) 경협사업을 거의 독점적으로 해오던 현대그룹이 자금난 등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독대한 사실이 밝혀져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청와대 요청으로 이루어진 이 회동에서 김 대통령은 대북 경협사업에 대한 삼성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삼성이 현대 대신 대북창구를 맡도록 요청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항간의 시각이다.

청와대나 삼성이 회동의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 그 자리에서 과연 어떠한 대화가 오고갔는지 정확히 헤아릴 길은 없다. 그러나 항간에 나오고 있는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이는 국민경제를 위해서나 남북경협 자체를 위해서도 큰 걱정거리며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삼성의 적극적인 경협참여나 현대를 대신한 대북창구 역할을 요청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남북 경제교류에 선도적 역할을 했던 대우(대우)그룹이 워크아웃으로 사실상 대북사업을 포기한 데 이어, 금강산 관광사업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경협사업에 나섰던 현대도 수익성을 따지지 않은 무모한 투자와 총수일가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인해 그간의 독과점적 경협사업이 아주 어렵게 됐다. 현대의 서해안공단 사업이나 금강산 경제특구 사업의 개발과 투자도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이미 경협을 약속한 정부는 경제협력 사업을 계속 이끌어갈 새로운 재벌그룹과 그 선단식(선단식) 리더십의 필요성에 대해 엄청난 유혹을 느꼈음직하다. 남북정상회담의 가시적 성과를 되도록 빨리 보여주려는 김대중 정부로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군다나 청와대 회동이 있었던 지난달 9일은 삼성이 윤종용 전자(전자) 부회장을 단장으로 한 30여명의 방북단 파견계획을 확정 발표할 무렵이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북한 남포공단에 단순히 백색가전공장을 건설하려는 것이라 말했지만 삼성 방북단은 실제 50만평 규모의 전자단지 조성사업 등 대규모 투자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대규모사업 외에 정부의 투자프로젝트에 삼성이 또 참여한다면 우리는 현대에 이어 재무구조가 상대적으로 건실한 또하나의 재벌이 경제논리를 벗어나 대북사업에 발목을 잡히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우리는 ‘남북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발전’이라는 것도 이런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순리대로라면 먼저 투자보장 협정, 이중과세 방지협정, 청산결제 등에 대한 제도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틀이 갖춰진 뒤라도 민간기업들이 수익성, 타당성 등을 따져 그들 주도로 투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북 경협사업은 결코 시혜(시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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