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북한의 욕설비방을 다루는 집권 측의 자세가 심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이회창 총재도 남북문제를 사려깊게 생각해야 한다” “이 총재도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이 진척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일…” “냉전적 사고가 더이상 자리잡지 못할 것…” “이 총재는 이미 차기 대통령이 다 됐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국민생각은 크게 바뀔 수 있다…” 등이 그것이다.

문제의 평양방송에 대한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이 발언은 집권 측이 지금 대북문제에서 도대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묻게 만들기에 족하다. 우선 지금의 시점에서 집권 측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북한의 말도 안되는 야당총재 매도 하나만을 다루는 것이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양비론을 말할 때가 아니다. 야당총재에게 “지금은 미묘한 시기이니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는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 필요가 있으면 그것은 다른 기회에 얼마든지 넌지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필이면 북한이 방약무인하고도 무례하게 남한의 야당총재를 마구잡이로 때려잡듯이 욕설을 해댄 바로 그 시점에서 “이 총재, 당신도 사려깊게 처신해야…”라고 나무란다는 것은 도무지 집권 측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분별력을 갖췄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또 그 청와대 관계자가 했다는 말의 내용도 괴이하기 이를 데 없다. 이회창 총재가 남북관계에 대해 한 그간의 말이 대체 뭐가 어떠했길래 “사려깊게 생각하라”는 경고를 받아야 했는지 우리로선 딱히 알 수가 없다. 상호주의를 강조한 것이 나빴다는 것인지, 핵(핵)과 미사일 문제를 언급한 것이 나빴다는 것인지, 그런 말들이 설령 누구의 비위를 건드렸건 한 나라의 야당총재가 그런 말도 못하거나 안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당연한 야당 역할을 어떻게 ‘냉전적’이니 ‘큰 코 다칠 것’이니 하는 비방적 말들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인지, 집권 측의 정신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적어도 이 발언으로 미루어 보면 집권 측은 “북한한테 매도당하는 사람은 그에게도 ‘냉전적’ ‘사려깊지 못함’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오직 현 정부의 대북 자세에 군소리 없이, 토달지 않고 전폭 만세만 불러주어야 ‘냉전적’이 아닌 사람이고 ‘사려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정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는 전체주의·획일주의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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