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秉默 정치부차장대우 bmchoi@chosun.com

고영구(高泳耉) 국가정보원장 후보에 대한 국회 정보위의 인사청문회가 열린 다음날인 23일, 서울 노원구의 한 40대 지역구민이 전화를 걸어왔다. 국회 정보위원인 민주당 함승희 의원의 지역에 살고 있는 유권자다. 2000년 총선에서 함 후보를 지지했다는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함 의원은 고 후보를 상대로 “판사를 했던 후보자가 (간첩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김낙중의 (석방운동을) 지원해 온 행태를 보면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총수로서 사상성이나 애국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사면이나 보안법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인사가 대한민국 정보기관장으로 적절한가 의심이 간다”고 추궁했다.

이 유권자는 “검사 생활을 한 함 의원이 투철한 국가관으로 의정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어제 청문회는 이를 충족시켰다”고 말했다. 함 의원이 고 후보를 지명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 민주당 소속임에도 야당 못지않게 검증에 나섰다는 점도 강조했다.

22일 청문회에서는 함 의원뿐이 아니었다. 같은 당 천용택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육사 출신인 천 의원은 군단장·국방장관·국정원장을 거쳤다. 누구도 그의 국가관·안보관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난 대선 당시 경쟁 정당 후보의 병역문제를 제기한 김대업씨와의 관련 여부로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섰던 그였지만, 이번 청문회에서는 그런 정파적 이미지도 깨끗이 씻어냈다. 그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이종석 사무차장을 향해 “여러분이 깊이 들여다본 그것(책을 의미하는 듯)만 갖고 세상을 보면 왜곡된 결과가 나온다. 경험된 지식만이 산 지식”이라고 ‘국정 경험자’로서 충고했다.

역시 검사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민주당 박상천 의원도 고 후보에게 “민변 회장 당시 보안법 폐지 주장을 했는데, 이번에는 개정으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글을 보면 상당히 과격한데 인사청문회를 의식한 편의적 변신인가”라고 물었다.

고 후보의 과거 경력과 발언을 종합해 보면 여당이다 야당 출신이다를 떠나서 당연히 묻고 따져봤어야 할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과거 우리의 국회사는 여당이면 대통령이 지명한 공직 후보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감싸거나 심지어 야당의 검증 시도를 방해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상당수 유권자들은 인사청문회라면 흔히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야당 의원은 제보를 받았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호통을 치고, 답변 태도와 같은 본질 외의 것을 문제 삼는 등이다. 반면, 여당 의원은 야당 의석을 향해 “정치공세를 펴지 말라”며 증인의 해명성 답변을 유도하거나 증인의 과거 행적을 미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22일의 국정원장후보자 청문회는 이런 인상들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민주당 정보위원 대부분이 우연히도 검사·군 출신들로 채워진 점,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가 역대 정권 때와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는 점, 고 후보의 경력과 발언이 국가최고정보기관장의 자질과 여러 측면에서 대비된다는 점 등등 다른 이유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어찌됐든 여당 의원들조차 철저한 검증에 나선 것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지금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정치개혁의 완성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 개인의 소신이 청와대 또는 당 지도부의 의중에 따라 거수기처럼 굴절되는 풍토에서는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여야를 떠나 의원들의 소신발언이 돋보인 22일 국정원장 청문회가 한국 국회 청문회사(史)의 새로운 장으로 기록되길 기대한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