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언뜻 알아듣기 어려운 이 낱말은 오랫동안 남한사회를 괴롭혀온 단어다. 이 호칭은 대부분 남한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남파된 공작원 또는 간첩으로, 체포돼 장기복역 중이거나 석방된 사람들을 이른다. ▶이들을 두고 북한은 일관되게 ‘비전향 장기수’로 호칭해 왔으나 우리 정부는 시대와 정권에 따라‘미전향 장기수’ ‘출소 공산주의자’ ‘출소 남파간첩 및 공안관련 사범’ 등 여러 갈래로 불렀다. 교도소 내에서는 ‘미전향 좌익수’라 부르기도 했다. 북한의 ‘비전향’에는 이들이 ‘결코’ 좌익사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고, 남측의 ‘미전향’은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우리 국내에서 ‘비전향’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90년대 초 이인모 북송문제를 계기로 일부 사회단체가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용어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식인 ‘비전향’(합의문 3조)으로 통일됐다. 이에 대해 우리 당국자들은 ‘용어 하나에 민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참 편리한 소리다. ▶엊그제 적십자회담 합의에 따라 이 ‘비전향 장기수’ 50여명이 오는 9월 북한으로 송환된다. 국내에 있는 83명의 장기수 가운데 당초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사람은 40명 정도였으나 남북정상회담에 고무되어 10여명이 늘었다고 한다. 수십년 만에 고향으로 가게된 이들의 감회는 남다른 모양이다. 어느 87세 난 노인은 “북한에 있는 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고,다른 장기수는 “이번 우리가 북으로 가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남북간에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장기수는 “분단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넘어가게 돼 가슴아프다”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듣기 거북하지만 나름대로 ‘칼날’이 들어있다. 그들 대부분이 공작원 또는 간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말 속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아직도 ‘세계의 역사가 폐기해버린 노페물’에 매달리고 있는 그들에게서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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