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주변은 마치 ‘김정일(김정일) 마술’에라도 걸린 것 같은 분위기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 보도는 물론, 일상의 대화에까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뉴스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김 위원장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상은 사라지고, 아주 친근한 이미지로 우리 앞에 ‘불쑥’ 다가선 듯한 착각을 준다.

미 뉴욕타임스지(지)는 이를 “(정상회담 후) 남쪽에는 엄청난 도취감(euphoria)이 있다”고 보도했다. 외국인의 눈에는 ‘도취감’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김정일 신드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지적·정신적 상태를 묘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혼돈’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존 인식과 관념들은 허물어져 가고 있는 듯한데, 무엇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지는 아직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그런 혼돈 속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우리 대북관(대북관)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누구도 통제하기 힘든 흐름들이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정상회담 후 우리가 ‘감정의 홍수’를 이겨내지 못하는 데 반해, 한반도 밖의 시각은 비교적 냉정하다. 뉴욕타임스는 백악관과 국무부 등 미 정부 안에서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를 놓고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사흘간의 미소와 축배가 북한이 핵·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없앤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비록 남북이 진정 화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해도, 앞으로 맞닥뜨릴 문제의 어려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젠 우리도 ‘김정일 충격’에서 극적인 요소들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숨을 고를 때가 됐다.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이 15일 서울공항 귀국 보고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언급했듯이, 남북관계는 지금까지 온 길보다 가야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박두식 정치부기자 ds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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