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브란트 서독 총리와 슈토프 동독 총리간의 첫번째 정상회담이 열린 곳은 동·서독 국경에서 그리 멀지않은 튜링엔주 주도(주도) 에어푸르트였다. 3월 19일 이른 아침 브란트는 특별열차 편으로 서독 국경도시 카셀을 떠나 동독땅으로 넘어갔다. 당시 동독땅에 들어서면서 동독인들로부터 받은 환영을 브란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국경에서 나는 의전절차에 따라 한 동독 관리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우리들이 지나가는 철로 연변엔 동독경찰이 지키고 있어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때로는 한사람씩, 때로는 무리를 지어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환영을 해주었다. 한 공장에선 직원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나와 환영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디를 보나 손을 높이 뻗친 사람들, 어디를 보나 창문을 열고 환영하는 장면이었다. ” ▶브란트는 아이제나하, 고타 등 유서깊은 여러 도시들의 기차역을 지나면서 느낀 감격을 계속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그 낯익은 도시의 이름들,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 특히 사민당 역사와 밀접히 맺어져 있는 그 도시 이름들의 푯말을 볼때마다 내 가슴은 형언하기 힘든 감격으로 뭉클거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데올로기, 조국분단, 전쟁,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아가는 김대중 대통령 일행의 북행길은 육로가 아닌, 항공편으로 굳어질 모양이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평양으로 가는 도중 개성, 사리원을 거치면서 브란트 처럼 ‘그 낯 익은 도시들의 이정표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형언하기 힘든 감격’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대표단이 육로를 이용한다 해도 브란트의 경우처럼 평양길 연도에서의 ‘자발적인’ 환영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지만. ▶애당초 북한측은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이 평양행 교통편을 굳이 공로(공로)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는데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일 것이다. 4시간 가량의 여행이 불편하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또 비행기로 곧바로 북한 수도에 입성(?)하는 효과도 생각했음직하다. 그러나 가장 큰 요소는 ‘환영’의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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