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이 베트콩에 항복하던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오늘의 호치민시)에서 벌어진 극적인 장면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당시 사이공발(발) UPI 통신은 월남 패망을 전하는 기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월남이 오늘 베트콩에 항복했다. 14년 동안 월남을 공산정권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미국이 성조기를 내리고 베트남 땅을 떠난 지 2시간 후에 일어난 일이다. ” ▶UPI 기사는 계속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월남 군대는 수도방위 임무를 포기하고 무기를 인도하기 위해 줄을 지어 시내 중심지에 집결했다. 30분 뒤 20대의 탱크에 올라탄 베트콩군이 붉은색과 푸른색 바탕에 황금색 별이 그려진 베트콩기를 달고 시가지로 들어왔으며, 대통령궁에도 베트콩기가 내걸렸다. 베트콩군은 곧바로 대통령궁에 진입했다. ”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마도 사이공에서 철수하는 미군 헬기를 향해 절규하는 베트남인들의 처절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미국대사 그레이엄 마틴도 헬기를 이용해 상륙함 블루리지호로 피신했다. 수많은 월남인이 시내 곳곳의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가 미군 헬기를 향해 ‘나도 좀 태워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으나 헬기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그런 아비규환의 사이공은 종전(종전)과 함께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꿔 달았지만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아 베트남 경제의 중심지로 다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25년의 세월과 함께 전쟁의 상흔은 말끔히 가셨다. 인구 550만명의 호치민시는 그 화려함이 방콕이나 싱가포르에 못지않고,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베트남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맡고 있다. ▶호치민 시민들의 개인소득은 약 1200달러로 베트남 평균 380달러보다 무려 3배가 넘는다. 호치민시가 이처럼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베트남 공산정권이 지난 86년부터 과감히 실시해오고 있는 개혁·개방정책 덕분이라고 하겠다. 월남전 종전 25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로서 새삼 생각나는 것이 바로 베트남과 북한의 비교다. 베트남이야말로 북한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타산지석(타산지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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