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燮/한신대 교수·국제정치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무려 열여덟 번이나 ‘동북아시아’를 언급했다. 사실 휴전선에 가로막혀 ‘반도(半島)’라기보다는 차라리 섬에 가까왔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공간 개념은 절실하다. 이 점에서 동북아론은 시원하게 펼쳐진 미래로의 초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동북아를 우리 민족의 명운을 거는 공간으로 삼기에는 몇 가지 점에서 조심스럽다.

첫째, 중국이 없다. 중국이 동북아의 일원이 아니라, 오히려 동북아가 중국의 일부라고 보는 중국인들의 생각은 뿌리가 깊다. 티베트나 신장을 아우르려는 중국은 스스로를 동북아로 한정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대통령이 취임 연설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변방의 역사를 살아 왔습니다”라고 만방에 선포하지만, 중국의 관(官)은 물론 민(民)에서조차 “변방적 연대”에 대한 호응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을 통해 새로운 문명적 중심으로서의 부활을 기획했다면, 중국은 이름 그대로 세계의 중심을 꿈꾼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중국을 향해 외롭게 동북아 협력을 외치는 것은 자칫 중국의 동북 3성이 연장된 유라시아 대륙의 꽁무니만을 자처하는 격이 될 수 있다.

둘째, 일본은 이중적이다.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라는 공간인식이 확산되어 왔다. 몇몇 일본의 정치인들이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오랜 방향축에서 벗어나 아시아로의 회귀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구호로 아시아의 연대를 악용했던 시간대를 아직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유럽연합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했고, 뼈저린 속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주류는 여전히 동북아에 묶이기보다는 G7의 하나로서 동양을 대표하는 서방의 일원이고 싶다. 따라서 아시아를 향한 사죄는 구차스러울 뿐이다. 국제를 지향하는 일본에 동북아는 그저 다리 하나를 걸쳐 놓은 곳일 뿐이다.

셋째, 동남아는 배제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동북아중심국가론을 표방한 지 불과 며칠 후에 싱가포르는 세계중심국가론을 발표하였다.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에 세계중심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한다. 왜 우리만 동북아의 틀 안으로 스스로를 한정하는가.

북한이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아시아안보협력기구인 ARF조차 동북아의 밖에 있다. 대륙의 실크로드가 쇠퇴한 것은 결코 남북분단이나 냉전 때문이 아니었다. 대륙의 실크로드는 동남아로 이어지는 희망봉항로의 발견과 함께 이미 몰락하기 시작했다.

철의 실크로드가 하루아침에 해양 실크로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북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강제적 해양진출을 통해 한민족의 대륙편향성을 완화시켰으며, 중요한 민족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넷째, 북한이라는 블랙홀은 복판에 있다. 과거 대륙의 실크로드가 해양의 실크로드에 밀려났던 중요한 이유는 대륙의 도처에 널려 있었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실크로드는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 너무 취약했다.

북한의 불확실성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해외동포를 포함한 민족 전체의 장래를 주도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정부가 북방회랑을 개설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북향집을 짓는 것은 바람직한 위험회피의 방식이 아니다. 민족의 명운이 걸린 지정전략적 방향축의 설정에 보다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의 등장과 함께 동과 서가 서로의 거울이미지를 보며 기겁하는 공간을 벗어나, 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를 마주보고 누가 먼저 총을 뽑을 것인가를 겨루는 공간을 초월하여, 새로운 공간으로 민족적 시간이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꿈은 가져볼 만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공간으로 설정된 동북아는 좁고 모호하다. 진정으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이 동북아와 동남아, 아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부산발 파리행 기차표’도 좋지만 그 기차로 과연 무엇을 실어 나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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