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트리뷴 미디어 서비스 인터내셔널

이라크와의 전쟁 준비에 바쁜 미국은 지금 한반도에서 더 심각하고 점증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요원들을 추방한 뒤 영변의 핵 시설을 재가동하면서 양자협상을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핵활동 동결의 대가로 불가침조약 외에 대미(對美) 협상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다. 불가침조약 제안은 겉만 봐도 속임수다. 미국과의 모든 기존 합의를 저버리고, 1983년 미얀마 양곤에서 한국 각료의 절반을 폭탄으로 살해했으며, 20여명의 일본인들(또 그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을 납치하고, 1987년에 대한항공기를 폭파시킨,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북한이다. 불가침조약은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과 일본 주둔 미군이 북한을 위협하고 있다는 구실로 다시 핵무기 개발 협박에 나서도록 만들 것이다.

미·북 협상은 두 가지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남한 내부의 민족주의적 감정의 증대에 비춰 볼 때 양자 협상의 교착은 곧 미국의 탓으로 치부될 것이고 한·미 관계는 더 악화될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통해 스스로 한민족 이익의 대변자로 나서면서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몰아갈 수 있다.

또 북한은 양자 회담을 미국에 촉구함으로써 핵 보유국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한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이려 할 것이다.

그것은 북한에 의무는 극소화하면서 운신의 폭은 극대화시켜 주면서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핵확산의 유인(誘因)을 만들어줄 것이다. 또 어떠한 (핵확산 금지) 합의의 이행에 대해서도 미국만 책임을 지는 반면에 핵무기 개발로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될 주변국들은 아무런 짐도 지지 않는 상황이 올 것이다.

북한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 능력을 갖게 된다면 세계적으로 핵확산의 빗장이 풀리게 되며, 동북아시아에서도 세력 균형에 중대한 도전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여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한국과 함께 중국·일본·러시아까지 가담시키는 것이 지상명령이다. 중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 보유와 핵 공갈 능력에 의해 사활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은 인접 국가에 의해 핵무기가 생산되고 그것이 확산될 경우 스스로 핵 보유에 나서거나 군비를 크게 확장하거나, 둘 다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한·미 동맹관계를 견지함으로써 안보 위기들을 넘겼고 자신의 군사력도 상당히 강화시켰다. 그러나 적어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한국의 우선순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전략을 정확하게 분석했지만, 그 결론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틈새를 만들었다. 지금 한국의 새 정부는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극단적으로 가져가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시사하는 것조차도 배격한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이 없이는 북한을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들기 어렵다. (양자든 다자든) 협상이 벌어지면 북한의 요구 목록을 의제로 삼게 돼 있고, 한국도 그 일부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좌파 그룹은 미국을 긴장의 근원으로 보며, 평화주의자들은 북한의 핵 계획을 미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하고,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핵 계획을 민족 자존심의 재확인으로 여긴다.

한국의 새 정부는 스스로 미국의 동맹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의 중재자라고 생각하고 미국에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평화적으로 협상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북한에 대한 압력 배격과 어우러져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하지만 미국이나 아시아 국가들에 핵확산 금지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한국의 목표와 미국의 목표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주한미군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과 한국의 국내 정치에 볼모가 되는 셈이며, 그런 상황은 한·미 간의 건실한 안보 관계 및 장기적으로 미군의 한반도 주둔과 양립할 수 없게 된다.

동맹과 그 전략에 대한 재평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실제 위협에 관한 더욱 주의 깊은 분석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멸망을 대가로 할 뿐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전형적인 냉전적 대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양쪽 다 궁극적인 무력 사용을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양측은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무력 충돌의 폭발점까지에는 못 미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 폭발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임무 가운데 하나이며, 한·미 동맹관계 속에서 그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면서 핵카드 장난을 하는 북한에 맞설 수 있는 진지한 전략이라면 한반도 안보 상황을 전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폭넓은 다자적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과정은 모든 당사자의 목표들, 즉 핵 문제, 북한의 고립 종식, 경제 협력 등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의 맥락 안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중국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하나의 방도는 한반도의 안보 장래에 관해 남·북한과 중국·러시아·일본·미국 등이 참여하는 회의체다. 중국도 일본도, 정치적 실체로서의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참여국들이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북한이 추구하는 불가침 보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의는 또 북한으로 하여금 세계 경제 속에 통합되는 틀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 통일 문제는 남·북한 간의 협상에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북한에 핵무기 보유를 승인해주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핵심이다. 머지않아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량은 국제사회가 군사적 수단이 아니고서는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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