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와대는 작금의 경제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말로는 경제가 어렵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나타나는 정책이나 움직임은 그렇지가 못하다.

최근 청와대에서 법인세 인하문제를 놓고 경제원론책에나 나올 법한 형평성 논쟁을 벌인 것은 한가한 발상이다. 모든 경제정책은 양면을 갖고 있는 선택의 문제다.

문제는 어느 시기에 어떤 정책을 채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법인세 인하여부는 지금 한국을 탈출하려는 외국인 투자가들을 유인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될 일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비상(非常)한 국면이다. 한 미국계 은행은 한국에 대한 신규대출을 일절 중단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면 기존의 대출을 회수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외환위기의 원인과 직결되는 것이다. 주식투자 자금을 서서히 빼가는 외국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런 위험상황을 이용, 큰 베팅을 하는 외국인들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가들의 눈에는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도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부나 친여(親與)매체들은 요즘 대다수 언론들이 경제위기를 과장한다며 불만을 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직전 언론이 위기를 축소보도했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지금 언론들은 정부를 흠집내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조기경보음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국내외 기업인들이 노무현(盧武鉉) 정부에 바라는 가장 절실한 요구사항은 경기대책도, 증시부양책도 아니다. 의외로 한·미간 갈등의 해소를 가장 원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은 한국이 미국의 동맹인지, 또 한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하는지 여부를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한·미관계가 경색되면 한국의 경제도 멍든다는 사실이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은 노 정부의 온건한 대북 접근이 미국과 불화를 빚는 것처럼 보여 한반도 위기가 장기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위기가 장기화되면 한국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한국인들은 이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국이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에 큰소리치면서 근근이 버텨가는 말레이시아는 그래도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노 당선자의 특사단이 미국에서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북한의 붕괴보다는 핵무장이 더 낫다는 의견이 있다”고 발언한 직후 월가의 신용평가사가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내린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재무부, 국제통화기금(IMF), 월가의 경제전문가들은 전화 한 통이면 의견 조율이 끝나는 긴밀한 사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이 경제적 발전을 이룬 데에는 미국의 시장개방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냉전 시절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공산독재정권과 싸우는 동맹국가에 미국시장을 개방했다.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로 불리는 미국의 이런 정책을 통해 큰 혜택을 입은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97년 말 IMF 외환위기 때도 한국을 도와준 나라는 결국 미국이었다. 당시 백악관에서 경제논리를 고수한 미국 재무부는 “실수를 저지른 한국에 교훈을 주자”며 반대했으나, 안보관계를 고려한 국무부와 국방부가 나서서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한 국가의 존망(存亡)이 좌우되는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에 대해선 거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을 책망하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할까? 미국인들의 눈에는 한국이야말로 ‘경제적 이익은 취하면서 자유에 대한 의무는 포기하는 이기(利己)적인 국가’로 비치지 않을까.

오만한 미국에 무조건 굴종하자는 말이 아니다. 싱가포르 고촉통(吳作棟) 총리의 말대로 초강대국을 상대할 때는 ‘실용적(實用的)’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정치와는 달리 적어도 경제분야에서는 1국1표나 1인1표가 통하지 않는 것이 냉엄한 국제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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