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勝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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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부에는 4명의 대변인이 있다. 수석대변인 쿵취안(孔泉)을 비롯, 3명의 대변인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의 브리핑에 번갈아 나선다. 요즘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북한 핵문제와 이라크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4명의 대변인들의 말은 이 사람 다르고 저 사람 다르지 않다. 이들이 북한 핵문제에 관해 하는 대답은 한결같다.

“조선(북한) 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다. 첫째는 조선반도의 비핵화이고, 둘째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며, 셋째는 관련 당사자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변인 저 대변인의 말만 한결 같은 것이 아니다. 중국 외교부의 대변인들이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북한이 NPT(핵무기 확산 금지조약) 탈퇴 사태를 빚었을 때부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뿐만이 아니다. 장쩌민(江澤民)이나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朱鎔基) 등 중국의 전·현직 국가원수나 행정수반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한반도문제만 나오면 “우리의 입장은 일관되며, 첫째는 조선반도의 비핵화이고, 둘째는…” 하는 말을 말 그대로 ‘노래하듯’ 읊조린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과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만 ‘노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중국과 미국 간에 맺는 3개 코뮈니케의 정신에 따라…”로 시작되는 노래를 암송하고 있으며,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평화공존 5원칙에 따라 내정 불간섭이며…”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이나 중국 지도자들이 암송하고 있는 그런 말들을 ‘타오위(套語)’ 또는 ‘타오화(套話)’라고 한다. 굳이 영어로 하자면 ‘Words Set(한 세트의 말)’이라고나 할까. 우리 말로는 ‘상투어(常套語)’쯤이 될까.

그러나 우리 말의 ‘상투어’가 다소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면 ‘타오위’ 또는 ‘타오화’에는 ‘준비된 말’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 처했을 때 이런 때 이 말 하고, 저런 때 저 말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둔 말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중국 외교부나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국가와 국가 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외교적 언사에 대해서는 타오위 이외의 말은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타오위 이외의 견해는 발표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한반도문제에 관한 타오위의 경우 외교부 한반도팀이 한반도와 중국관계를 잘 정리해서 올린 것이며, 그 과정에서 외교부장과 외교 담당 부총리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대해 잘 정리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을 경우 혼란이 초래될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미관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북한과 미국관계를 중재하겠다”느니 “사회주의권에 대한 봉쇄가 성공한 일이 없다”느니 하는 말들이 한·미관계를 흔들어놓고 있다고도 한다. 물론 새로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나 전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그 이전 대통령들도 그랬다.

한 국민의 운명이 걸려 있는 외교가 대통령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외교에 관한 한 대통령의 말은 반드시 해당부처 전문가들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라야 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 후보의 말도 담당 브레인과 연구기관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점쯤은 누구라도 아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라도 외교에 관해서는 ‘준비된 말’만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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