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玄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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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전후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갓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남북문제와 관련해 앞으로 겪게 될 시련과 극복해야 할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예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담긴 의미를 얼마나 깊이 성찰해내고 대응책을 마련하느냐에 따라 새 정부 대북정책의 초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선 정부는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뒤덮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겨보아야 한다. 시민들은 북한 핵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고, 우리 사회의 ‘친북 반미’ 성향을 나무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임을 결의했다.

보수성향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념적 성격을 띤 대규모 집회를 갖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보수층의 본격적인 세력화와 행동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수적 ‘넥타이 부대’의 출현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여념없는 보통사람들까지 거리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라의 안보가 왜 이렇게 위태로워졌는지를 집권층에 따져 물었다. 이들이 당장 정부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한반도 위기는 북한정권의 핵무기 개발 때문인데 왜 정부는 김정일 정권에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에 시비를 걸어 한·미동맹관계를 위험하게 만드는가.”

시민들의 이 단순한 의문에 정부는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북한 핵문제에 관한 정부의 대북·대미 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내부의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민들의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3·1절 남북한 ‘민족대회’에 참가한 북한 대표들은 ‘반미 민족공조’를 외쳐댔다. 여기에 박수를 보내는 남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교회에서도 정치선전을 늘어놓다 신도들의 제지를 받는 불상사를 빚었다.

남한 내의 이념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 틈을 파고드는 북한의 선전공세가 서울 한복판에서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러다가는 우리 사회가 ‘이념의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결성된 단체의 핵심 멤버가 지명수배 상태에서 버젓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해 온 사실까지 드러났으니 도대체 국민들은 무얼 믿고 살아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비서실 직원이 동독 간첩으로 드러나자 사임했던 사건과 비교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도 누군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럴 움직임마저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무엇보다 우리 내부의 이런 혼란상을 조속히 정리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스스로 마음을 열고 국민 여론을 폭넓게 포용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가 전(前) 정권의 대북정책을 계승한다고 천명하면서도 굳이 그 이름을 ‘평화번영정책’으로 바꾼 것은 지난 5년간의 햇볕정책이 남긴 부정적 이미지와 유산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현재의 나라 안팎 사정은 햇볕정책의 성과를 확대 재생산하기보다 그것이 남긴 부(否)의 유산을 정리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실정이기도 하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어받은 슈미트 총리는 새로운 지평을 넓히기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으로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그는 보수 야당으로부터도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보수정당)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서독의 역대 친서방 정책과 동방 정책을 융합해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음미해 볼 만한 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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