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康 媛/시인

84번째 맞는 3·1절. 어느 해인들 독립을 위해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그 의미를 되새기지 않고 넘어갔을까. 그러나 이번 3월 1일은 역사적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넘어가기엔 우리의 발등에서 타고 있는 시급히 꺼야 할 ‘분열의 불똥’이 너무 크게 느껴진 하루였다.

이념과 세대 그리고 계층의 차이는 그 모습에서, 부르짖는 목소리에서 너무 확연하게 보여져 “이걸 어쩌나!” 하는 탄식이 소름처럼 돋았다. 왜 며칠 전 사회각계 원로 188명이 깊은 우려를 나타내는 모임을 가졌는지 그 의미도 새삼스러웠다.

1일 정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10여개 종교 사회단체가 개최한 ‘반핵 반김과 미군철수 반대 국민대회’와 다섯시간 뒤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족자주 반전집회’는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양분화 현상과 흑백논리의 함정, 그리고 세대ㆍ계층간 분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아침부터 내린 빗자국이 채 가시지 않은 광장 앞마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태극기와 미국의 성조기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꽉꽉 채운 파란 풍선을 양손에 든 ‘5. 6. 7.학년 학생들(50~70대)’로 채워졌다.

지난 몇년 동안 변방에서 침묵을 무기로 지내왔던 그들의 용트림이어서 일까. 전쟁, 쿠데타와 가난 등 고초의 세월을 담은 얼굴이 바로 그들의 명함인 각계각층의 노·장년층들은 지팡이를 집었건 느린 움직임이건 한결같이 형형(熒熒)한 눈빛을 내쏘고 있었다.

“바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내쏘는 빛이라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번영의 열매를 따먹는 젊은이들은 또 그 소리야 하겠지만 식민통치와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요즘의 사태를 꿰뚫어 볼 수 없어요.” 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벽에 집을 떠났다는 이들, 곳곳에 빗물이 고여있는 축축하고 차가운 광장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오늘의 사태를 안타까워했다.

광장을 가득 휘날리는 플래카드와 주름진 목에 매달린 종이판에는, ‘북핵개발 저지, 미군 철수 반대’,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돈 퍼주고 폭탄 맞나’, ‘북한은 우리의 주적(主敵), 미국은 우리의 혈맹(血盟)’ 등의 구호가 씌어 있었다.

반면에 탑골공원에는 성조기 대신 통일기가 태극기와 함께 자리했고, ‘이북동포 환영해요’, ‘미국은 즉각 전쟁행위 중지하라’, ‘살인미군 철수’, ‘우리는 자기 전에 부시를 씹습니다-Bushlitol’ 들로 이곳이 한때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았던 나라였던가 의심할 만큼 급진적 개혁의 목소리다.

머리에 태극기 두건을 쓴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늘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미군이 철수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북한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직접 대화하면 됩니다”라고 외쳤다.

언제나 대립과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바로 국민이고 그리고도 잘되는 나라를 보지 못했다. 수많은 인명이 의미없이 희생되었고 경제는 주저앉았고 당연히 나라를 통째 삼키려는 외국세력이 밀려오는 수순을 밟았다.

이대로 간다면 애국으로 분칠한 이념의 덫에 걸려 우리나라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 것이다. 84년 전 선조의 절규를 되살리고 그 에너지로 이제 분열로 인한 국력소모를 막고 다시 한번 옷깃을 가다듬는 냉철함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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