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당국간 대화를 촉구한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이후 북한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 당국자들은 어떤 진전이 있는 듯이 내비치는가 하면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북한에 대화를 너무 간청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어 민망하기 짝이 없다. 김 대통령은 유럽순방에서 돌아온 직후인 13일 방송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베를린 선언을 수용할 것’이라며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유럽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수준을 넘어 자기들이 북한을 설득하겠다는 분위기였다’고 전에 없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는 이날 저녁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14일 육사 졸업식에서는 “어떠한 레벨의 남북대화도 적극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박재규(박재규) 통일부장관은 자신감을 넘어 자가발전(자가발전)을 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그는 베를린 선언 발표 전에 북한과 사전교감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다른 고위당국자들은 교감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데도 마치 있었던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민간차원의 교감은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북한당국과는 별개일 뿐더러 대표성이 전혀 없다. 그는 또 ‘북한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더라도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총선 전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정부방침’이라며 마치 무슨 진전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북한이 우리의 제의에 긍정적으로 반응해 오길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그렇다고 북한의 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 고위당국자가 미리 “이러 이러하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설령 북한이 반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총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다가 총선 후에 차분히 실천하면 그 뿐이지 도대체 미리 그것을 선전하는 이유는 무슨 의도인가.

정부 고위당국자들의 잇단 발언은 물론 분위기를 잡기 위한 충정이란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북문제는 결코 말로써는 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고 최대한 진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핵심이다. 북한이 공식반응을 보여도 대화를 진척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공연히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남북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국민들만 혼란 속으로 몰아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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