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온통 이라크와의 전쟁 문제에 휩싸여 있다.

지난 주말만해도 전세계 60여개 크고 작은 도시에서 반전(反戰)시위가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계 여론에 몰려있는데도 미국 정부는 이라크 침공을 구체화하고 있고, 미국인들은 생화학테러에 대비한 긴장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뉴스 시간마다 생화학테러에 대비한 피난 요령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만큼 한국과 북한 문제는 현재로서는 옆으로 비켜서 있는 분위기다. 어떤 미국인은 “이라크가 아니었다면 지금 미국TV는 한반도 문제로 영일이 없었을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반도 문제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속으로 잠재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엊그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새삼 한국주둔 미군의 병력 수준과 재배치 문제를 거론한 것은 이라크의 와중에서도 한국과 북한 문제가 여전히 미국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 포함돼 있음을 내비치는 것이며,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도를 두 단계나 낮춘 것도 한국 문제가 잠재적 위험성을 지녔다고 보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보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두가지 트랙(線)을 하고 있다. 하나는 북한의 핵(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내의 반미(反美)문제, 즉 한미관계다.

과거에는 이 두가지 쟁점이 별개로 존재했는데 이제는 교차하거나 뒤엉켜 있다는 것이다. 평행선이었던 두 쟁점이 서로 교차하거나 하나로 묶여 이어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미국은 새로운 대안(代案ㆍoption)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부시행정부는 북한 문제로 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내년 11월 재선(再選)에 임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어 부시의 이라크 실험(實驗)이 성공할 경우 부시의 대담성이 더욱 두드러질 가능성이 크다.

톰 대슐 상원의원 등은 부시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의 존재가 명백히 확인되지도 않은 이라크는 침공하면서 이미 2개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믿어지는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 있다며 부시의 ‘약’을 올리고 있다.

또 NYT의 크리스토프 같은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핵궤도 진입’은 활발해질 것이므로 더 이상 북한과의 대화 내지 타협을 미룰 수 없다는 대화불가피론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부시 행정부는 되도록 이라크 문제를 빨리 매듭짓는대로 한반도 문제에 어떤 선(線)을 그을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이 여의치 않은 상태로 진행되거나 끝날 경우 부시는 재선 포기를 놓고 한국 문제에 공격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이라크에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북한에서 만회를 노릴 것이고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더욱 대담성을 노출할 것으로 보여 한반도 문제는 이래저래 한국과 북한이 원하는 대로 풀릴 것같지 않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시의 ‘대안’은 이렇다. 북한의 핵정책이 완고하고 주한미군의 감축 내지 철군이 불가피하다면 일본 대만 또는 한국까지 포함한 핵화(核化)를 카드로 꺼내 중국 등 주변 강대국과 게임을 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는 북미(北美)와 남미(南美)를 아우르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형성, 아시아 시장을 위협ㆍ교란함으로써 중국을 대북 압력의 다리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으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지금 미국이 세계의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량 살상무기 제거라는 것에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걸고 ‘너희는 반대하라, 우리는 간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미국은 어제의 미국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세계 각국의 국민들은 반전(反戰)을 외치지만 정부들은 비교적 조용하다. 아랍국가들은 더 그렇다. 미국이 테이블 밑으로 허리띠를 쥐고 있는 형상이다. 그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지난 주말(8일) CBS방송의 ‘60분’프로를 보고 한국내에서의 반미, 반부시 감정에 놀라움과 함께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다. “심각한 줄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 프로에서 한국의 어느 대학생은 부시와 김정일 중 누가 더 위험한 사람인가 라는 물음에 부시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그 학생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미국은 무섭고 ‘위험한’ 나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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