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燮/한신대 교수·국제정치

“모든 통일은 옳은가? 그렇다.” 남북 공동성명이 있던 1972년, ‘재야 대통령’이라 불렸던 장준하는 이렇게 썼다. 비록 박정희와 김일성을 독재자로 간주했던 장준하 였지만 통일은 그만큼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장준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으로 ‘통일’의 숭고성이 어떻게 훼손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했다. 이후 장준하는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통일운동의 제자리찾기에 나섰고 19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전에 이루어진 대북 비밀송금에 대해서도 통일의 숭고성에 비추어 모든 것을 덮자는 논리가 있다. 혼란스럽다. 만일 그토록 자랑스러운 민족통일사업이라면 굳이 감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을 밝히게 되면 미국이 남북경협을 방해할 것이고 대북채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논리는 괴상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나 외국투자자들은 현대의 대북사업이 대박이라도 터뜨려주기를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그런 심정에 편승해서라도 정부나 기업이 지금이라도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확신했던 배경을 밝혀주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1972년 장준하가 당했던 배신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어떤 개인이나 정파의 욕심을 위해 ‘통일’이 전용되지는 않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통일’이 돈과 권력에 의해 독점되는 것은 21세기의 코리아가 지향해야 할 시민민족주의적 통일에는 맞지 않는다.

통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진정한 통일(統一)은 통이(通異)다. 이것이 “수령이 마음먹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북한식 통일과 대한민국식 통일의 차이다.

국민(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의)은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알고 싶다. 블랙홀처럼 북한 권력자에게 빨려 들어간 선샤인은 뜨거웠지만 그 햇볕이 만들어낸 그늘에서는 서릿발이 내렸다. 죽음을 피해 만주땅에서 방황하고 있는 탈북인들,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정치범’(과거 남한의 민주투사들에게도 붙여졌던)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들의 처지를 한 번이라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한 민족에 대한 평가는 그 민족의 최대치에 따라 내려지기도 하지만 그 민족의 최소치에 따라 더 확실하게 내려진다. 그 돈은 우리 민족의 최소치를 끌어 올리는데 과연 어떤 기여를 했는가.

현대가 획득했다고 하는 50년간의 토지사용권은 두 가지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 하나는 북한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분단체제가 50년간 지속되는 경우이다. 현대가 두 번째 경우를 상정하면서도 이 사업을 통일사업이라고 부른다면 통일의 개념은 달라져야 한다.

아울러 북한이 첫 번째 경우를 상정하고 있지 않고 두 번째 경우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미국에 대해 불가침조약 체결을 고집하기 앞서 남북한 국가의 상호승인과 동시에 국가연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진정한 ‘민족공조’의 길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분단시간은 동·서독에 비해 훨씬 깊고 길다. 전쟁을 통해 근대국가가 성립되듯, 전쟁을 통해 봉인된 남·북한 분단의 시간은 차라리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분단시간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벨기에와 네덜란드 사이의 분단시간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에 가서 왜 같은 민족, 같은 언어의 독일과 통일하지 않느냐고 묻다가는 나치 잔당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룩스동맹과 유럽연합 등을 통한 이들 나라들의 통일 수준은 수십년 동안 통일을 부르짖었던 남북한에 비해 훨씬 앞서 있다.

이제 통일 구호가 빚어낸 남남 분단의 현장에서 남·북한 주민, 해외동포가 마음을 모아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통일인가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이 이야기판에는 분단과 전쟁에 간여했던 나라들의 자리도 당연히 마련되어야 한다. 이야기판을 열 화두는 30여년 전에 배반당했던 문답의 반전에서 찾아진다. “모든 통일은 옳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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