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起昌/변호사

‘대북(對北) 송금문제와 관련해 검찰은 수사 유보’라는, 형사소송법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통치권 차원이기 때문에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의 결과로 생각한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죄 공판 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청했으나 최 전 대통령이 증언을 거절하자 구인을 요구했던 측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보면서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최 전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증언내용이 12·12 사태 당시 현직 계엄사령관의 구속과 관련된 문제와 5·17 당시 계엄확대 선포에 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이는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에게 모욕적인 구인까지 하게 했던 그 정치세력이 대북송금은 남북관계라는 국익차원이라면서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적당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바담 풍하더라도 너는 바람 풍하라는 것이 세상사라고 웃어 넘기면 해결될 일인가? 적어도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언행일치(言行一致), 수미일관(首尾一貫)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둬들여야 한다.

최 전 대통령의 증언 거부와 대북 송금문제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최 전 대통령의 경우 현직 대통령의 시해(弑害)라는 위기상황에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계엄사령관의 구속과 계엄확대라는 사안이 일어났을 때 대통령이 한 의사결정에 관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통치행위라고 판단함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고 하겠다.

대통령의 모든 행위가 통치행위인 것은 아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정치행위만 통치행위라고 할 뿐이다. 계엄의 선포, 확대, 선전포고 등이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범죄행위를 한 경우 재직 중에는 기소되지 아니하나 임기 만료 후에는 기소되어 처벌받을 수도 있으며 내란과 외환의 경우에는 재직 중에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대북 송금과 관련이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통치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행위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 또 대북 송금문제는 나타난 사실만으로 볼 때 현대아산이라는 기업이 돈을 보냈다는 것이므로 통치행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북측에서 송금행위가 현대아산의 정당한 투자였다고 거들어 대통령의 의사결정과 관계없는 현대아산의 문제로 부각시키려하고 있는데, 어떻게 통치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대통령의 언제 어떠한 의사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통치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문제는 더 있을 수 있으나 우선 통치행위에 따른 구체적 의사결정에 대한 해명이 하루속히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뿐더러 우리와 같은 민족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북한은 정치체제를 달리하는 적으로 피를 흘리며 싸운 사이다. 우리가 싸운 이유는 공산 전체주의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를 보장,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북한 핵 문제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지렛대로 하여 미국에 체제보장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현 체제의 보장을 받아 계속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해 온다면 우리는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북 문제는 민족이라는 감성 문제로만 해결할 것이 아니고 적대세력과의 외교문제로 냉철하게 다뤄야 한다. 또 적대세력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잘못 다룰 경우 외환죄로 처벌되는 사태까지 예상, 신중히 접근해야 하며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몇억달러라는 큰 돈이 정상이 아닌 방법으로 북으로 넘어간 사건은 반드시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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