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반도 상황은 혼돈 그 자체다. 외신에 따르면 평양은 등화관제 훈련까지 할 만큼 결전(決戰) 분위기로 가득하고, 미국 부시 행정부는 군사조치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서울은 태평성대다.

대북 비밀송금 의혹으로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고 있건만 이런 세상 인심에는 아랑곳 않는 ‘3·1절 공동집회’ 운운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정녕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제사회의 공분을 낳고 있는 북한 핵문제는 다른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존망이 걸린 우리의 문제다. 우리가 남의 집 불구경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한 북핵 위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 당선자는 지난 두 달 가까이 미·북 중재론까지 펴면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해 왔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치밀하게 계획된 인상을 주는 북한의 핵도발은 단계적으로 강화되고 있고, 부시 미국 정부는 이제 ‘외교적 해결’만을 언급하던 수준을 넘어 군사조치도 배제하지 않을 기색까지 비치고 있다. 지금 상황은 미국과 북한이 각각 앞으로 닥칠 중대한 국면을 위해 제 갈길을 가는 듯한 양상이다.

이 와중에 각종 남북사업과 행사까지 예정돼 있어 혼돈을 부채질하고 있다. 남북 교류·협력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지금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의 연관성이 드러나고 있는 대북 비밀송금 의혹은 국기(國基)를 위협하는 중대사안이다. 거창한 남북사업보다 의혹을 규명하는 일이 시급한 때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주 중에 ‘남북 경협추진위’를 열어 남북사업을 협의하고, 민간차원에서는 ‘3·1절 민족공동행사’를 위해 북측 대표단 100명을 서울에 초청하는 문제까지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북핵 포기 공조 구축에 분주한 국제사회를 향해 ‘민족공조’의 의지라도 한껏 과시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대북송금 의혹으로 상처받은 국민의 심사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근본이 흐려지는 듯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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