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비밀리에 열린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때 현대측 정몽헌, 이익치씨가 동석했다는 보도에도 불구하고 정·이씨측은 어제까지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이같은 정황 자체가 보여주는 바대로 현대 관계자는 “현대가 북에 보낸 돈은 정상회담 대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여론조사에 나타난 것처럼 많은 국민들은 진작부터 이 돈이 정상회담용 ‘뇌물’이었던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속았다’는 배신감은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북한 정권에 뇌물을 주고 정상회담을 산 것은 ‘남북평화를 위한 고뇌’도 아니고 ‘북한 동포를 위한 결단’도 아닌 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단(分斷) 문제를 ‘뒷돈 건네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활용한 다음 얼렁뚱땅 엉터리 장부 속에 감추고 관련 기업에 특혜를 준 한편의 거창한 스캔들인 셈이다.

이런 나라를 국제사회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는 불문가지다. 국제사회의 그런 차가운 시각이 장차 우리 국익에 어떤 화(禍)를 안길지를 생각하면 비밀송금 당사자들의 ‘국익’ 운운 변명은 한심스러울 뿐이다.

사건의 진상이 검찰의 수사 포기 속에 언론 보도에 의해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고 있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런 가운데 여권이 이번에는 ‘검찰이 다시 수사를 하면 야당은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떠보았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새 정권이 이를 부인해 여·야 입씨름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어쨌든 이제 검찰은 다시 수사를 하든, 하지 않든 여권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의 처지를 면할 수 없게 돼버렸다.
국가기관으로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검찰이 그나마 자존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건을 파헤쳐 국민 앞에 내놓고 수긍을 얻는 방법뿐이다. 문제는 ‘검찰이 혹시나’하는 일말의 기대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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