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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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임기 중 현대그룹을 통해 이뤄진 수천억원의 대북 송금에 대해 지금 여권(與圈) 인사들은 ‘어려운 북한 돕기’였다거나 ‘평화를 사기 위해 지불한 돈’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토록 당당한 대의명분이 있었다면 왜 진작부터 내놓고 하지 못하고 하늘이라도 무너질 듯이 비밀에 부쳐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햇볕정책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흔히 ‘퍼주기’라고 비판해 온 것은 특히, 명분이 약하거나 일방적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000억원(또는 실제 액수가 그보다 얼마나 더 많았든) 송금 의혹도 현대그룹의 특정 기업들을 통했지만 기업 고유 활동의 일부였다고는 보기 어려운 규모와 방식으로 송금이 이뤄졌고, 들어간 곳은 결국 북한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였다.

그 돈이 평화를 위해 지불된 돈이라는 주장은 타당한가? 아니다. 그런 돈이 오히려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쓰였으면 쓰였지, 북한의 대남 군사력 태세는 하나도 완화된 것이 없다.

그들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 왔고, 미사일 실험 발사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서울을 눈앞에 두고 휴전선 바로 북쪽에 집중 배치된 장거리 포들을 포함한 재래식 군사력의 위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돈 받는 동안 도발하지 않는 거라면 폭력배에게 행패 부리지 말아 달라고 정기 상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 2주년을 맞은 작년 6월에 서해에서 난데없이 무력 도발을 한 것은 돈의 약발이 떨어져서였다는 말인가. 북한이 ‘불량배 국가(rogue state)’니 ‘범법자 국가(outlaw state)’니 불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려운 북한을 돕자는 지원이었다면 진정 그 돈이 북한 백성들을 살리고 경제를 세우는 데 쓰이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댄다면 굶주린 아이들의 얼굴에 윤기가 돌고, 나무 베어진 산에 식목과 사방(砂防)사업이 이뤄지고, 비료공장이 들어서고, 낡은 철길이 고쳐지고, 주택이 개량되고, 발전소가 건설되고, 낡은 송·배전망이 교체되는 일 따위가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동족을 돕는 건 좋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지원과 검증이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세계은행(IBRD) 같은 국제금융기관이 개발도상국에 장기 차관을 줄 때는―과거 우리도 그런 돈을 많이 얻어 썼지만―돈의 사용처에 대한 사전 심사와 집행 과정까지 투명한 국제적 감독이 이뤄지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백성들은 계속 고생하는 가운데 정권 연장과 군사력 강화에만 돈이 쓰이도록 비자금 돈줄을 대주는 거라면 그것은 오히려 반국가·반통일·반민족적인 범죄행위가 될 것이다.

흔히 여권 인사들은 과거 서독이 통일 전까지 동독에 엄청난 규모의 현금·물자 지원을 해줬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옳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상호주의 원칙을 지켰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

가령 금강산에 남한 관광객이 몇명 방문하고 달러로 돈을 줄 때마다 북한에서 이산가족 몇명이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가게 한다든가, 남한 정부가 북한에 돈을 얼마 주면 북한이 휴전선의 대포 몇 문(門)을 몇 ㎞ 후방으로 빼게 한다든가 할 수는 없었을까.

새로 출범할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북한 지원에 관한 새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김대중 정부의 실패로부터 교훈으로 얻어야 할 것이다. 지원되는 돈의 집행에 관한 투명한 검증은 결코 내정 간섭이 될 수 없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 때문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길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외국 정부나 국제금융기관도 북한에 돈을 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 같은 지원은 물론 점진적인 북한의 개방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북한이 살아남고 남북이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택해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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