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년 전인 13세기 중반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승 두 사람이 8년간에 걸쳐 험준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 몽골의 수도를 방문했었다.

고려 고종(高宗) 말년으로 몽골이 개성을 점거하고 왕족을 몽골에 인질보내고 있던 그 무렵이다. 「잡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는 공포말고도 굶주림·갈증·혹서·혹한·인해(人害)·수해(獸害) 등 상상을 초월한ㅡ」 고난을 겪은 수도승 카르피니와 뤼브뤼케는 각기 기행문을 남겼다.

전자의 기행문에는 그곳 왕궁에서 만난 고려 사신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 인질 잡혀가 있던 왕족 왕순이나 사신으로 가있던 박수(朴 )였을 확률이 높다. 이 고려 왕족을 카르피니는 솔랑기인(人)으로 적고있는데 아마도 신라(新羅)에서 와전된 당시 고려의 별칭이거나 통일신라시대에 일본이 불렀던 시라기의 와전이 아니었던가 싶다.

뤼브뤼케는 카타이(중국의 러시아말 호칭)는 바다에 접해있고 그 바다 가운데 섬에 사는 까우레와 만제에서 온 사절을 보았는데 그 섬 둘레의 바다는 겨울에 얼기에 몽골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까우레 사람들은 몽골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마다 3만2000금을 바친다고 견문을 적고있다.

여기 까우레(Caule)는 고려(高麗)의 중국발음인 까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양문헌에 나온 최초의 코리아 호칭이다. 만제는 확인할 길 없으나 당시 중국에서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통칭인 만자( 子)의 중국발음인 것 같다.

이 까우레에서 비롯된 꼬레아·꼬레·꼬라이라는 호칭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서양인들의 통칭이 돼내렸으며 1591년도 예수회 연보의 한국관계 기사에는 꼬라이 왕국, 화란의 항해가 린스호텐의 「동방안내기」에는 꼬레제도(諸島). 화란의 「동인도회사 각서」에는 꼬레아로 돼있다.

제주도에 닌파했던 화란의 하멜 일행의 표류기에는 코레로 돼있는데 꼬레아는 고려의 일본말 발음인 「꼬라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일 게다.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 포교를 한 스페인 예수회 수도사 샤비엘은 그의 일본인 신도로부터 꼬라이(Corai)에 대한 말을 들었다는 기록 이래 선교관계 문헌에는 꼬라이로 돼있다.

북한에서 영어계 호칭인 Korea가 아닌 불어계 호칭인 Corea를 공식채택했다는 외지보도가 있어 이 말의 뿌리를 더듬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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