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孝祥
/경제부장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송금사건은 경제계로선 재앙(災殃)에 가까운 사건이다. IMF 외환위기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한국 기업들의 불투명성이었다. 한보와 기아가 쓰러지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회계장부를 불신하게 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서둘러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촉발 계기였다.

외국인들은 투자를 할 때 투자대상 기업의 실적이 나쁜 점보다도 ‘도대체 실적을 알 수가 없는 점(불투명성)’을 가장 싫어한다.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97년 말 기자가 미국에서 만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렌스 클라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한국정부와 재벌기업 간에 은밀히 이루어지는 부도덕적인 거래가 한국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했었다.

그러나 이번 대북 비밀송금사건으로 지난 5년 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우리 기업의 투명성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됐다. 상장(上場)기업인 현대상선과 하이닉스·현대건설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회계장부는 조작된 내용임이 밝혀졌고, 이 회계장부를 믿고 현대 계열사 주식에 봉급을 투자한 수십만 명의 소액투자자들은 분노에 못이겨 잠을 설치고 있다. 주주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재벌 오너가 회사 돈을 개인 돈처럼 마음대로 빼돌린 사실에 외국인들은 또 한번 경악하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시장경제의 선량한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정부 스스로 불법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정부가 국책은행에 압력을 넣어 거액을 조달하고 돈세탁을 거쳐 해외의 북한계좌에 비밀송금을 주도했다니,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경일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할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저지른 불법이 금융실명제법과 외환관리법 위반 등 모두 1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는 온갖 해괴한 금융정책을 동원해 ‘현대 살리기’에 나섰던 정부였다. 이래서야 어느 외국인이 한국정부를 믿고 경제활동을 하려 하겠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상선의 이번 대북 비밀송금사건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가 도입하겠다고 밝힌 집단소송제도에 정확히 적용되는 대상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증권분야 집단소송법은 분식회계·주가조작·허위공시에 의한 소액주주의 피해를 집단소송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번 현대상선 사건은 분식회계와 허위공시에 해당된다. 그동안 재벌기업의 투명성을 누구보다 강조해온 노 당선자로선 진상규명과 문책을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게 됐다.

국민들이 더욱 분노하는 점은 이번 사건의 은폐과정에서 드러난 부도덕성이었다. 4000억원의 비정상적인 대출금을 사후에 갚기 위해 현대상선은 알짜배기 회사를 외국회사에 팔아야만 했다. 영업실적이 가장 좋았던 현대상선의 자동차운반선 사업부문을 지난해 말 13억달러에 스웨덴 해운사에 매각한 것이다. 북한에 몰래 제공한 뇌물성 자금 때문에 결국 멀쩡한 상장회사 하나가 거덜나버린 것이다.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무책임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김 대통령이 스스로 주장하듯 현대상선의 대북송금이 평화를 위한 통치행위였다면 먼저 김 대통령이 스스로 떳떳하게 밝혔어야 했다. 백번을 양보해 부득이 먼저 밝히지는 못했더라도, 지난해 9월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가 이를 폭로했을 때는 즉각 사실을 시인하고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당시 엄 전 총재의 폭로를 전면 부인하며 도리어 엄 전 총재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다. 신문사가 임직원의 가불금에 이자를 계산하지 않은 점을 놓고 마치 중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다루던 정부가 이런 엄청난 불법행위는 통치행위 운운하며 어물쩡 넘어가려 하고 있다. 이런 정부와 대통령을 믿고 외국인들이 자신의 돈을 맡길 리가 없다.

이제 미사일과 핵을 개발하겠다고 나서는 북한정권에 세계와 국민을 속이고 현찰을 제공한 한국정부의 대외공신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과 뇌물은 전혀 다른 것이다. 비밀송금에 개입한 외환은행의 신용등급은 어떻게 되며, 외환은행 주주들의 피해는 누가 갚을 것인가. 만약 이 일로 인해 천신만고 끝에 회복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또다시 내려간다면 정말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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