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비밀 송금 의혹사건을 둘러싸고 책임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원칙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무원칙한 행태를 일삼고 있으며, 자숙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고개를 들고 있어 개탄을 금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어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변인을 통해 “진실은 규명돼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그 방법은 국회가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표한 것이 우선 그렇다. 이 발표의 핵심은 ‘진실은 규명돼야 한다’는 원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 규명의 주체·절차·범위를 ‘국회가 판단해달라’는 데에 있다.

국회도 당연히 정치·사회적 현안을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 권한과 책임은 행정부의 집행행위를 견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 3권분립의 기본 원칙이다. 지금 이 사안에서 행정부는 검찰권의 행사라는 집행행위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런 행정부가 국회에 자신이 해야 할 집행행위의 결정권 전체를 떠넘긴다는 것은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방기하는 처사이다.

우리는 노 당선자가 아직 당선자의 신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은 불과 22일 남았으며, 지금 모두가 노 당선자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현실이다. 노 당선자가 “검찰은 법과 원칙대로 수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면,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 당선자가 행정부의 차기 수장(首長)으로서 자신의 권한과 책임에 속하는 일을 국회에 미룬 것은, 정치적 기교는 될 수 있어도 책임있는 자세는 아니다.

법의 수호자로서 원칙을 지켜야 할 검찰은 원칙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검찰에 대해 정치로부터의 절대분리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수준에선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고려는 먼저 법을 실현한 이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대북 비밀송금과 관련해서는 지금 구체적인 실정법 위반 혐의가 도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찰 간부들 사이에 “수사에 앞서 정치권의 논의를 먼저 지켜보자”는 말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은 이 정부 검찰 내부에서 법의 정의 실현이라는 기본원칙이 너무나 쉽게, 너무나 자의적으로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책임하고 무원칙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대북 비밀송금의 당사자들은 자숙하는 빛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 문제를 ‘통치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수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부터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김 대통령은 국민의 돈인 산업은행의 자금이 법을 뛰어넘어 북한에 제공된 일에 대해 먼저 국민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법의 통제를 받지않는 ‘통치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절대적인 요건인 ‘국민적 컨센서스’를 정부는 일찍이 확보한 바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북 비밀송금 창구였던 현대상선의 정몽헌씨가 북한으로부터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 초청을 받았다면서 출국금지 해제를 검찰에 요청하자, 검찰이 이를 수용할 방침이라는 소식은 더욱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은 남측이 사건을 파헤치면 그것은 곧 ‘교류중단과 전쟁’이라는 식으로 노골적인 위협을 가해오고 있다. 그리고 “정씨를 4일부터 시작되는 육로관광 사전답사때 제일 먼저 통과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의 성패와 ‘정씨가 제일 먼저 통과하는 것’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한 이상, 이는 ‘이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북측의 또 다른 개입일 뿐이다. 이런 판에 정씨나 검찰의 출국금지 해제 움직임은 북측의 이런 부당한 개입에 현정부가 또 다시 내응하는 모양새가 될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우리가 또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야는 조만간 이 사건 처리를 위한 협의를 가질 예정이다. 우리는 진실규명을 위한 최적의 수단은 ‘수사권’이라고 믿는다. 얼마의 돈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북한으로 갔는지를 밝히는 수단은 계좌추적 등 본격적인 수사외엔 달리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적 해결방식’ 운운은 진실을 발견하기보다는 매몰시킬 우려가 더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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