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서강대 교수·경제학

레닌(1870~1924)과 스탈린(1879~1953) 같은 구(舊)소련 지도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말 가운데 귀담아 들을 말이 없지 않다. 요즘 문득 그들이 자본주의 장사꾼을 비아냥거리며 내뱉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자본주의 장사치들은 이익이 된다면 제 목을 조르는 데 쓰일 동아줄도 팔아먹는다.”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햇볕정책에 따라 추진된 대북경협사업 주체 가운데 이익 추구에 투철한 사업가가 있었나가 첫째 의문이고, 그가 제공한 자금이 북한이 우리를 옭아맬 동아줄(무기 구입과 핵개발)을 준비하는 데 쓰이지 않았나가 두 번째 의구심이다.

요 며칠 사이 의문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대북 사업은 ‘통치자의 결단’이므로 2235억원의 북한 송금 여부를 캐는 “사법수사는 부적절하다”는 청와대 발표가 의혹의 정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군사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을 움츠리게 만들던 대통령의 ‘통치행위’ 논리가 이른바 민주화 시대에도 동원되고 있다는 데 경악하게 되고 정계와 재계의 유착관계에 관심이 집중된다.

97년 환란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나. 기업이 정경유착에 집착했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투명성·공정성 높이기를 요구하는 글로벌 기준의 잣대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와 기업(그것도 부실 징후가 농후한 기업)이 서로 짜맞추기 식으로 추진한 사업에 국책은행까지 동원된 것이 정경유착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동안의 대북사업 추진 방식이 투명성 기준에 합당한 것이었나. 바로 이 대목에서 지난 5년간 구조조정의 공든 탑이 붕괴될 수 있다. 북한 송금의 실체를 밝히느냐 못 밝히느냐가 세계인이 지켜보는 첫 번째 진실 게임이다.

다른 또 하나의 진실 게임은 국가 안위와 직결된다. 대북 송금 여부를 따지다가 자칫 북한이 “너 죽고 나 죽자”고 나올 것을 우려해 진실을 호도하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국가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영국의 사상가 버틀란트 러셀(1872~1970)은 반전·반핵 운동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입장은 상황 논리였다. 1차 대전 때는 징집 거부로 옥고를 치루었지만, 2차 대전 때는 나치 정권을 타도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원자폭탄 개발 직후 세계 평화를 위해 핵무기를 독점한 미국이 타국의 핵개발을 저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련 등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그는 입장을 바꾸었다. 각국의 과학자들과 함께 퍼그워시(Pugwash)회의를 개최하는 등 60년대 반핵운동을 주도했다. 공산주의(Red)와 죽음(Dead)을 양자택일의 구도로 보고 “죽음보다는 공산화가 낫다”냐, “공산화보다 차라리 죽음이 낫다”냐의 양자택일이 핵심 구호였다.

그는 핵전쟁이 문명세계의 종말(죽음)을 뜻하고, 공산화는 그래도 후손에게 생명의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아 전자를 선택했다. 그후 미국의 경제, 군사력 우위 앞에 동구권의 맹주 동구권이 몰락했으나, 핵 보유 국가는 야금야금 늘어났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도 부익부 빈익빈, 노동 계층의 억압 등 문제가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사회복지, 공정거래, 서민층 권익보호 등을 확대하는 방향의 조치가 보완돼야 한다.

레드(Red)에도 여러 색깔이 있다. 러셀이 인내할 수 있다고 본 레드는 ‘수용소 군도’가 없는 옅은 선홍색체제라면, 북한의 레드는 가장 음울한 검붉은 레드이다. 그것은 타락한 공산주의, 가부장적 전체주의, 개인숭배를 합친 사교(邪敎)집단 체제이기 때문이다.

남한도 모순투성이지만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그런 남한과 북한 가운데 양자택일 문제에서 북한이 선택 대상일 수 없다. 북한이 핵개발로 위협하면 남한도 핵무장하겠다는 결의로 맞서야 한다. 그래야 북의 협박과 도발을 막고 의미있는 통일도 가능하다.

한반도는 아직 냉전 끝자락에 있다. 진실의 게임을 회피하고서는 자유민주국가로서의 정체성 보존과 시장경제 번영은 있을 수 없다. 남한의 문제는 국가 정체성을 잃은 정치꾼, 사업성 계산에 아둔한 장사꾼들의 득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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