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한 신혼부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한국에 와보니 50년간의 오랜 분단도 한민족의 전통을 완전히 다르게 할 수는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남한에도 시골에 가면 결혼식풍경은 북한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결혼식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같은 민족이면서 달라진 우리의 전통, 결혼문화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본다.

북한의 결혼식은 대부분 전통 혼례식으로 치러진다. 단지 전통한복의 착용이나 신랑신부 맞절 등의 전통방식은 거의 없어졌다. 여자들만 한복을 입고 남자들은 양복을 입는다. 복장 외의 것은 대부분 전통 혼례식대로 행해지고 있다. 북한에서 결혼할 때에서 남녀 간의 짝도 지어주고 상당한 관여를 하는 것처럼 남한에서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자유롭게 연애결혼도 많이 하고 중매결혼을 한다.

남자들의 인민군 복무연한이 10~13년 정도라, 능력 있는 자들은 군 복무하는 현지에서 연애하여 제대할 때 고향으로 데려오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제대 후 중매로 결혼한다. 평양과 같은 대도시 출신의 군인들은 힘겨운 군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현지처녀들과 사귀면서 먹을 것도 좀 얻어먹고 하면서 도움을 받는다. 그러다가 제대할 때는 알리지 않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 피해를 보는 지방처녀들이 많다.

군에 가지 않는 대학생들이나 일반 젊은이들은 대부분 연애를 선호한다. 특별히 고위층의 자녀들은 당에서 지정하여 결혼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모두 허락을 받으면 결혼식 날이 정해진다. 북에서도 궁합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동네마다 궁합을 잘 본다고 소문난 사람이 있는데 몰래 찾아가 보게 된다. 북에서는 궁합은 사회주의 생활 방식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금지돼 있다. 만약 궁합을 보다가 발각되면 생활총화에서 신랄히 비판받게 된다. 그래도 민간에서는 공공연히 궁합을 보고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결혼을 그만두는 경우도 간혹 있다. 식량난으로 약혼식은 거의 사라졌다.

◆ 양가 사이에 주고받는 혼수

고위층으로 분류되는 중앙당급 간부자녀들이 결혼할 때에는 '대장함'으로 불리는 예물 함이 양가에 전해진다. 이 함속에는 신랑 쪽은 대체로 신부를 위한 옷이나 화장품, 신부쪽 가족들을 위한 양복천 등을 넣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유가 있는 집은 신부쪽 일가친척들에게 옷 한 벌씩을 폐물로 주기도 한다. 고위층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이나 지방에서는 함이 따로 없이 예물만 준비해서 양가에 전달하는 집도 많다.

북한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결혼을 위해 크게 돈을 쓸 일이 없다. 다만 결혼식날 술값으로 돈이 좀 들어갈 뿐이다. 집은 국가에서 배정하고 부엌살림살이나 집안 가구, 이불 베개 등의 살림살이는 신부 쪽에서 장만한다.

평안도나 황해도에서는 신랑 쪽이 여유가 있으면 살림살이 좀 해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함경도에서는 살림살이 전부를 신부가 모두 장만하는 풍습이 강하다. 결혼적령기에 가까운 딸이 있는 집에 가보면 포장도 뜯지 않은 이불이나 부엌살림살이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활이 어려워서 새것이 생기면 우선 자식 시집보낼 생각에 부모들이 하나하나 모아두기 때문이다. 집안에 딸이 셋이면 아버지 담배물주리(곰방대)까지 가져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딸 많은 집은 결혼을 다시키고 나면 집안이 거덜나기도 한다. 재일 교포들이나 당고위층간부들은 시집가는 딸에게 오장육기(찬장·이불장·옷장·책장·신발장 - 냉동기·세탁기·텔레비전·녹음기·선풍기·사진기)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거의 최고위 특권층이나 돈 많은 재일 교포들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물건들이다.

◆ 결혼식과 술

신랑·신부 혹은 그들의 가까운 친척들은 결혼식 날 전후로 3~5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신랑·신부의 친구들이 주로 결혼식준비를 도와준다. 결혼식을 치르려면 우선 술이 가장 많이 필요하고 국수, 김치 등도 필요하다. 돼지를 잡는 집도 있는데 이쯤 되면 손님 접대를 잘 한다는 평을 듣는다.

북에서는 술이 귀하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술을 얼마만큼 손님들에게 푸짐히 내어주는가가 잔칫집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식료공장에서 공급되는 30리터의 술을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이나 개인집에서 만드는 밀주를 사서 충당하기도 한다. 보통 결혼식을 잘 치르는 집은 100리터 내지 150리터의 술을 쓴다.

직장에서 결혼축하금이 100원정도 나온다. 직장동료들은 돈을 모아서 선물을 사주거나 현금으로 부조한다. 보통 5원정도를 부조금으로 쓰며, 친한 친구나 가족은 10원부터 30원까지를 부조금으로 쓴다(일반노동자들의 한달 평균 임금이 100원 정도이고 입쌀 1㎏에 40원정도임,식량난 이후로는 80~100원 까지 올랐다고 함). 그러나 현금보다는 현물이 귀한 탓에 술이나 쌀로 부조하는 경우도 많다. 결혼식을 치르는 집에서는 이런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뽑은 밀주는 한병(약 0.5리터)에 10원정도 한다. 쌀의 경우에도 암시장가로 거의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술값과 쌀값은 거의 같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작년에 남한에 온 탈북자에 따르면 술 5병(약 2.5리터)을 모으면 결혼식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못 구해서 결혼식을 못했다고 한다. 결혼식에 오는 사람들에게 술 5병만 가지고 술 한 잔씩이라도 제대로 대접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술 5병을 못 구해서 결혼식을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 결혼식의 풍경

결혼식 당일에는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예물 함이나 예물을 가지고 신부의 집을 찾아간다. 신랑을 맞이한 신부집에서는 신랑을 위해 상을 차린다. 그런데 이 상은 신랑이 손을 대기 전에는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술도 제일 좋은 술이 나오는데 기대 이하의 술이 나오면 신랑 친구들이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 신부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좋은 술을 구해 와야 하며 신랑이나 그의 친구들이 만족하게끔 해주어야 한다.

보통 신부집에 차린 상 가운데 신랑이 제일 먼저 닭다리를 뜯어먹고 같이 간 친구들도 가장 맛있는 것을 골라 먹는다. 그런 후에 나머지 상을 들고 신랑의 집으로 간다. 이 때 신부와 신부의 가족이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가며, 또한 신랑집에는 신부 및 신부 가족들을 위한 상이 준비된다. 그런 후에 신랑집에서 본격적인 결혼식이 시작된다.

북에서는 모직 같은 천연 섬유보다 테트론 같은 합섬 섬유가 인기가 좋다. 합섬 섬유가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신랑이 입는 양복이나 신부의 한복은 대체로 가내 편의협동조합이나 옷을 잘 만드는 개인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입는다. 신부친구들이 꽃으로 신부의 머리나 한복주위를 예쁘게 장식해준다. 가내편의 협동조합 소속 사진사가 결혼식에 참석하여 이들을 찍어준다. 사진 값이 비싸기 때문에 사진사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얻어먹은 것만큼 사진이 잘나오기 때문이다.

잔칫집의 이웃집들은 대개 자기 집을 손님 맞는 방으로 제공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웃집을 도와 상도 날라주고 부엌도 함께 제공해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보통 북한에서는 결혼식뿐만 아니라 장례를 치르는 등의 행사가 있을 경우 이웃집들이 도와준다. 이웃집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행사를 치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특별히 주례라고 할 사람은 없다. 신랑 직장의 당비서나 신랑과 안면 있는 고위층 간부가 신랑·신부에게 축하의 인사말을 간단하게 한다. 축하의 인사말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당과 수령에 대한 말이 빠질 수가 없다. 또한 代를 이어 충성하라는 내용도 곁들여 진다. 이러한 인사말이 끝나면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김정일의 노래를 다같이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술판이 벌어진다.

신랑·신부의 친척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특별상을 대접받아서 괜찮게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직장동료, 동네친구들, 학교동창, 마을주민 등은 결혼식 집을 방문하여 부조하고 잔치국수와 술을 먹고 간다. 그런데 과거에는 부조에 상관없이 똑같이 대접받았으나, 최근에는 부조한 만큼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경입니다. 가령, 부조금에 따라 5원짜리 방, 10원짜리 방으로 나누어 다르게 대접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람들은 차별대우한다고 흥분 하지만 어려운 것은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한다.

◆ 결혼 풍습에 관한 단상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님이나 친지들에게 술잔을 올리고 또 축하하러 온 신랑·신부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술을 돌린다. 이날에는 흥을 돋우기 위해 친구나 다른 집에서 오디오를 빌려오기도 한다. 북에서는 오디오 자체가 워낙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잘 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디오 주인은 직접 본인만 작동하는 조건으로 오디오를 가지고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결혼식 집에 간다.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로 해 놓고서 '휘파람'과 같은 경쾌한 북한음악을 듣는다. 이러한 음악들은 잔치집 분위기를 흥겹게 해준다.

남한에 와서 한 가지 놀란 것이 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신랑·신부 친구들끼리만 피로연을 따로 하고, 또 신랑·신부가 피로연장에 잠시 나타나면 친구들이 온갖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북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북에서는 결혼식 절차가 끝나면 신랑·신부 각각의 노래로 시작해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 순간을 위해 기타를 잘치는 친구가 특별히 초대되어 반주를 맞추어 준다. 1985년 이후부터는 남한노래가 북한에 유행되면서 결혼식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이 되면 북한노래 보다는 남한노래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당신은 모르실 꺼야', '사랑해 당신을', '사랑의 미로'와 같은 노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결혼식 날이면 기타반주에 맞추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다. 밤이 깊어 끝날 무렵이 되면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만수무강 축원노래로 마무리된다. 만에 하나 신고 들어갈 것을 염려해 끝나는 노래는 더욱 목청껏 부른다. 그래야만 주위 사람들이 건전하게 결혼식이 끝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한에 와서 제주도나 해외로 신혼여행 가는 것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북한 젊은이들은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첫날밤도 집에서 보내야 하고 신혼여행은 동네 한바퀴 도는 것이 고작이다. 남한에 와서 친구들의 결혼 앨범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야외촬영 한 것을 보면 신랑·신부가 마치 영화 주인공처럼 멋져 보인다.

결혼식 날에는 유난히 신발도둑이 극성을 부린다. 신발이 워낙 귀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돈주고 사기 힘든 것이 신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좋은 신발을 신고가면 신주머니에 넣고 항상 들고 다녀야 한다. 저도 한번 일본의 친척이 보내준 일제 신발을 신고 결혼식 집에 갔다가 잠시 한눈판 사이에 누군가가 가져갔다. 신발을 잃어버려서 결혼식 축하고 뭐고 신발 찾느라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닌 기억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버려도 아깝지 않는 신발을 신고 가거나 아예 신발주머니를 꼭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 이상적인 배우자상의 변화

젊은이들의 결혼관을 비교하면, 남한 젊은이들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집안 따지고, 능력 따지고, 돈 따지고...... 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사랑이 밥 먹여 주냐',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여자는 무조건 이뻐야 한다' 등의 말을 하는데, 이런 것은 북한 젊은이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다.

물론 북한에서도 배우자를 고를 때 그러한 것을 고려한다. 과거에는 당간부의 자식이나 출신성분이 좋은 집 자제가 결혼 1순위였다. 근래에 들어 외화벌이에 종사하는 사람 등의 돈 잘 버는 사람이 새로운 1순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도 '조건'을 따지는 정도는 남한보다 덜 한 것 같다. 조건보다는 사랑을 중요시한다.

재일북송교포들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당고위층 간부는 물론 일반 당원들마저도 결혼을 기피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김정일의 후처 가운데 재일북송교포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가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게 됐다. 이때부터 재일북송교포들 가운데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애국자들이 많다는 김정일의 칭찬까지 있게 되면서 재일 교포들의 신분이 갑자기 높아졌다.

물론 여기에는 급격한 경제난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래서 이들을 차별하지 말고 당고위층 간부자녀들도 이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공개 지침이 전달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돈 많은 재일 교포들을 상대로 당고위층 간부자제들이 결혼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南男北女'라는 말이 실현됐으면 좋겠다. 특히 장가 못 가 속상해 하는 한국의 농촌 노총각들이 북한 처녀들과 결혼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해본다./ 강철환 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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