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와서 처음 맞은 명절이 추석이었다. 국정원(당시는 안기부) 직원들은 탈북자들이 명절을 전후해 넘어와 사람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고 투덜거렸다. 얼마나 크고 중요한 명절이기에 저럴까 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북에서는 추석이 조상 묘에 다녀오는 하루 휴일 정도의 별 볼일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TV를 보니 추석이 민족최대의 명절이라면서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 차량들로 도로가 꽉꽉 막혔다는 등 온 나라가 그야말로 대명절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 스스로가 추석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실감하게 된 것은 아마 남한에 와서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라 생각된다.

북에서는 민족최대의 명절을 김일성, 김정일 생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날만 오면 온 나라가 떠들석하고 평소에 못 먹던 음식을 먹는다.

어릴 때 이날 먹게될 갖가지 음식과 선물들을 생각하며 단꿈을 꾸던 추억이 떠오른다. 김일성 생일이나 김정일 생일에 받아 안게될 사탕과자나 학생교복 등을 생각하며 북한 어린이들은 마냥 즐거워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단한 일상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2일간의 휴일에다 평소 먹기 힘든 고기라든가 술, 담배가 공급되기 때문이다.

북한사람들에게 명절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남쪽 사람들은 평상시나 명절이나 먹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북한사람들에게 명절은 먹는 것이 정말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의 최대 명절은 김일성부자 생일이다. 그래서 여기에 익숙해 있는 탈북자들은 처음 남한에 와서도 추석이 큰 명절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추석이 오면 조상님 묘소를 찾아 뵙고 벌초도 하고 차례를 지낸다. 묘소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하루 이틀 전에 짬을 내어 먼저 벌초를 하는 경우도 있다.

남한에서처럼 민족대이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추석을 전후해 3일간은 여행증 없이 道 내 구간만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특별기간이 선포된다. 그래서 이 3일간은 기차가 터져 나갈 지경입니다. 기차 안으로 못 들어간 사람들은 기차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조상님묘로 간다. 남이나 북이나 조상을 그리는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열차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죽음을 무릅쓰고 기어이 조상님묘로 가고 싶어하는 북한사람이나,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지칠대로 지쳐가면서도 기어이 고향으로 가는 남한사람들은 참으로 비슷해 보인다. 북한에서는 이 3일간 열차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에 종파주의의 온상이 되는 가족주의를 뿌리뽑는다고 시골동네의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들을 전부 해체하여 뿔뿔이 갈라놓았다. 6·25전쟁시기 미군과 국군의 발길이 잦았던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성분이 의심되는 계층은 함경도의 산간오지로 보내고, 대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황해도나 평안도로 집단이주 시켰다. 그리고 대학졸업생이나 인민군 제대자는 고향과 상관없이 집단적으로 특정 광산이나 탄광지대 같은 곳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어 한 집안이 한군데 모여 사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농촌지역은 조금 다르다. 가장 낮은 신분과 고된 노동, 그리고 사회적 멸시 등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농촌을 빠져 나오려는 경향이 심해졌다. 농촌지역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꼼짝못하도록 법적으로 묶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농촌처녀와 결혼하는 도시총각은 농촌으로 와야하는 조건까지 생겼다. 이런 이유로 농촌지역 사람들은 그나마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대체적으로 모여 있다.

추석전 장마당은 장보러 나온 주부들과 일반주민들로 북적된다. 귀한 것이 있으면 좀 무리해서라도 조상님 차례상에 올리고 싶어하기 때문에 대목에는 과일이나 생선 등이 일반 장날보다 비싼 가격에 팔린다. 국영상점에서 세대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것을 공급하기도 하지만 공급하는 것만 가지고는 추석을 제대로 치를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밀주를 빚거나 암시장에서 술을 장만한다.

추석날 아침이 되면 제사음식을 머리에 인 아낙네들과 가족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어지고 묘소로 향하는 행렬이 이어진다. 대부분 터가 좋은 자리에 공동묘지가 있어 아침 일찍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만나 인사도 나누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추석날 묘소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묘소에 못가는 경우에는 집에서 지낸다. 차례상에 음식을 놓는 방법은 남한처럼 전통이 지켜지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충 보기 좋게 밥과 국을 떠놓고 과일이나 다른 음식들을 차린다. 절은 한번에 세 번을 한다. 남한에서는 재배(두번)반 하는 것으로 아는데 북한에서는 왜 세 번을 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식구들이 음식을 뜯어서 묘 뒤나 옆자리에 뿌리는 것으로 차례가 끝나고, 술과 음식을 가족들이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다.

둘러보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 서로 와서 함께 먹자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서로의 묘소에 와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고 술도 한잔씩 오고 간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집 저 집 묘소를 왔다갔다하면서 술을 얻어먹고 아예 산에서 취해 쓰러져 자기도 한다.

대부분 한 동네 사람들이 같은 공동묘지를 사용하고 있고 교통수단도 없기 때문에 묘소에 가면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애들은 여기저기 오가면서 자기 집보다 맛있는 것을 해온 음식을 보면 얻어먹느라 정신이 없다.

가족들이 많이 모이고 북적대는 묘소와 달리, 썰렁한 묘소는 대부분 남쪽에 고향을 둔 월북자 가족이나 북송교포들의 묘소다. 저도 돌아가신 할머님묘소에 갔다가 남쪽에 고향을 둔 월북자 가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외로운 사람끼리 같은 곳에 묘소를 만들어 놓는다. 언젠가 몇 가족이 함께 모여 술잔을 들이키며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모습도 기억 난다.

남한은 거의 모든 주민들이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해 고향을 찾지만 북한에는 교통수단이 기차를 빼고는 전혀 없기 때문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반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공동묘지에 가면 몇 년째 벌초도 못한 묘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남북한을 모두 살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민족의 최대명절은 어떤 개인의 생일이 아니라 민족 대대로 내려 온 추석이 돼야 함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보름달이 둥실 뜬 추석하늘을 바라보며 민족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명절이 같은 피줄을 나눈 우리동포들도 함께 나눌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강철환 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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