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鎭炫

최근 반미(反美)문제를 놓고 좀 해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직접적 대상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과 대사관 직원, 기업인 그리고 미국에 있는 지한(知韓)인사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물리적, 심리적 위협 내지 고통과 불편을 토로하고 있다.

최근 한미경제협의회(KUSEC)에 KUSEC 동남부협의회 상대역인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 직원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부친도 한국전에 참전했고 일곱 번이나 방한했던 이 직원은 “현재 미국에 대한 한국(그리고 북한?)의 태도는 대단히 의외이며 실망스럽다.

이 순간 반미시위를 하는 한국민을 위해 판문점 최전선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미국병사들에게 특히 더욱 슬프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한국에 대한 이들의 기억은 아마 영원히 얼룩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나는 지금 내가 아시아에서의 군복무를 일본에서 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른다”로 맺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그간 반미, 염미(厭美), 혐미(嫌美)의 직접 또는 간접 지원세력이었던 분들이 오히려 반미가 줄어들고 있다고 열심히 주장하고 다닌다. 주로 미대사관 촛불시위에 초점을 맞추어 심지어 미문화에 심취한 한국 젊은이들의 자주의사 표현일 뿐 반미가 아니라고 입을 맞추고 있다.

촛불시위의 언론보도 내용만 보면 평화시위이고 월드컵 4강 이후의 자신·자부·자주의 의사표시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현실 정치인, 노무현 당선자측에서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이런 뉘앙스를 강조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교수, 연구자, 언론인 등 지성인들이 1980년대에 비해 반미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퓨즈연구소의 전세계적 비교 여론조사나 국내 모든 여론조사에서 반미와 6·25 북침설(통일전쟁설) 등이 돌출적으로 상승하고 중국·일본·북한에 대한 호감이 늘어나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다.

지난 20여년간 여러 요소에 의한 반미의 조직적 축적, 특히 1980년 전두환 등장과 정치적 반미, 광복과 분단에 대한 해석과 북한의 선동, 해방신학적·제3세계적 반미와 부패한 보수세력과 반친미(反親美)라는 요소까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 기층에서의 친미 축소, 반미 상승은 분명하다.

문제는 반미가 줄고 있다고 보는 세력의 자기모순이 국정을 혼란케 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한국현대사 수정주의 보스격인 제임스 팔레 교수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의 ‘독립’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논리적 일관성이 분명했다. 그는 계속 한국이 미군철수를 주장할 수 있게끔 ‘군사력 성취’를 희망하고 있다는 주장과 미군철수로 인한 높은 군사비 부담, 북한이 핵 포기를 안 했을 때 핵무기 경쟁비용도 각오해야 될 것이라는 주장도 같이 했다.

그런데 팔레 교수를 따르는 국내 수정주의 세력은 반미와 미군철수, 독립 평등관계를 주장하면서도 감군(減軍), 축소된 군사비의 복지전용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열린 사회, 민주사회에서는 사회주의도 반미도 6·25 북침설도 주장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상과 주장을 펴는 근거, 사실의 진실성·적절성에 대한 검증의 철저함이 얼마나 있느냐에 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실력에 있어 1·2·3·4등 하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4강에 둘러싸여 있는 유일한 민족이요, 국가이다. 이 지정학·지경학적 숙명에서 자주와 독립과 평등을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근대사를 불행하게 했던 강성대국, 제국주의적 힘이 아니라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우리에게 꼭 매달릴 수밖에 없게 하는 힘, 즉 미국 무기제조에 꼭 필요한 일본의 기술이나 서방의 중동정책에 꼭 필요한 아랍 정보를 쥐고 있는 이스라엘처럼 전략적 첨단기술, 첨단정보, 첨단지식을 창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4강보다 월등히 높은 도덕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반미, 반일, 반중, 반러보다는 진짜 친미·친일·친중·친러주의자가 필요하다. 최소한 지미·지일·지중·지러의 깊이와 수준이 4강만큼, 어느 부분은 4강보다 높아야 비로소 독립·자주의 대화와 협상이 가능하다.

4강을 가장 잘 안다는 것은 곧 세계질서를 가장 잘 아는 세계국가가 되는 것이요, 한국인이 가장 충실한 세계인이 된다는 뜻이다.

18세기 한말의 4강, 20세기 항일독립운동 과정의 4강, 냉전기의 4강 관계를 반추하며 반미가 결국 거친 친일·친중·친김정일로 경사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과 자주의 21세기 한국민족주의의 정체성, 정통성을 정립하자.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전 서울시립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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