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문희상(文喜相) 비서실장 내정자가 15일 대북 4000억원 비밀 지원 의혹과 관련해 “현 정부가 털고 가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집권측의 정치적 속사정은 별개로 하더라도 ‘털고 가야 하는 것’ 자체는 이제 불가피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 정권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에 4000억원을 주지 않았느냐’는 의혹은 시간이 흘러 흐지부지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검찰, 감사원 등 관련 국가기관 모두가 조사를 미루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가운데 당사자인 정몽헌(鄭夢憲)씨는 남의 얘기하듯 명확한 답을 피하고 있다. “무언가 있는 것 아니냐”는 국민적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현대전자 관련 회사 매각대금 1억달러가 남북 정상회담 즈음에 증발한 사건까지 겹쳐 있다.

문 비서실장 내정자는 “집권자는 알고 있을 것 아니냐”고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언급한 적이 없다. 새 정권이 이 짐을 지고 가기 싫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차후에 특별검사가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사건을 파헤쳐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 우리는 문 내정자 말대로 김 대통령이 국민에게 말 할 것이 있으면 지금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문 내정자가 “만약 공개할 수 없는 통치행위가 있었다면 덮고 넘어 가야 한다”면서 “법적으로 통치행위는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한 대목은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이 사법적 판단 밖에 있는 이른바 ‘통치권’이란 것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선 정설이 없다.

설사 통치권이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적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민주 헌법의 근본이다. 대북 4000억원 비밀 지원이 불가피했다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국민적 공감대라고 강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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