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남편 만난 ‘수절 두여인’

50년 만에 남편의 모습을 대한 김필화(68·경북 안동)씨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편의 소매를 부여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남편 조민기(65·경북 안동 출생)씨는 결혼 1년 만인 50년 10월, 의용군으로 끌려 갔다. 당시 김씨의 뱃속에는 아들 규석(49)씨가 6개월째 자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동네사람들은 “남편이 죽었다”고 했지만 김씨는 믿지 않았다. 재혼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30년 전부터 체념하고 남편의 제사를 지내왔다”는 김씨는 이날 오후 상봉장에 들어서서 재회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담담한 표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50년 가까이 유복자인 줄 알고 살아 왔던 아들 규석씨는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아버지가 건강해 보이셔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북의 남편은 재혼해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규석씨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외아들인 줄 알았는데 5남매의 장남이 됐다”고 애써 웃었다. 경북 안동에서 농사일을 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안동포로 곱게 지은 모시옷을 가져 왔다.

유순이(70·충북 청주)씨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유씨가 남편인 김중현(66·충북 청원군 출생)씨와 생이별한 것은 결혼 6개월 만인 50년 9월쯤. 의용군으로 나가며 “3년만 기다려 달라”던 남편이었다.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던 영우(49)씨는 이제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지난 8월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 때에서야 유씨는 남편의 최근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50년이 지났지만 찬찬히 뜯어 보니 영락없는 남편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어머니 곁에서 아들 영우씨는 “유복자인 줄만 알고 자랐는데 나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외아들과 충북 청주에서 힘든 농사일로 생계를 꾸려 온 유씨는 남편에게 “아들이 농사일을 하느라 중학교밖에 못나온 것이 가장 큰 한(한)”이라고 말했다.

“남편이 젊었으니 재혼을 했으려니 했지요. 그래도 상관없어요”라고 유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짐작했듯이 남편은 북한에서 새 아내를 얻어 5남매를 두었다. 유씨는 남편을 위한 선물로 500달러를 준비했다.

/최재혁기자 jhchoi@chosun.com

◈북아내 만난 ‘남의 남편들’

북한에 있는 아내를 만난 남측 남편들도 많았다.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8일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다 헤어진 아내와 두 아들을 상봉한 교회장로 양철영(양철영·81)씨는 아내 우순애(73)씨의 뺨을 끝없이 어루만지며 50여년간 쌓였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양씨는 “혼자서 시어머니 부양하고 아들, 손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면서 부여잡은 아내의 손을 놓지 못했고 우씨는 “살아있는 것만도 고맙다”며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양씨는 당초 아내,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북측 가족 9명의 생존사실이 확인됐으나 상봉장에는 아내와 두 아들만 나왔다. 아들 효식씨는 “급작스레 기별을 받아 온 가족이 나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석만길(84)씨는 북측의 아내 정보부(86)씨와 딸 정실(65) 정옥(55) 정화(49)씨, 아들 춘태(63) 신영(61)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석씨의 아내 정씨는 남편 옆에 서서 자녀들을 소개하는 등 밝은 모습이었다. 평양 철도관리국 축구선수 출신인 석씨는 충남에 있는 자신의 과수원에서 딴 배로 만든 배즙 1박스를 선물로 준비했고, 남쪽에서 재혼한 아내가 북측 아내에게 준비한 선물도 전달했다.

백남선(82)씨도 북한에 남아 큰 딸 기손(58)씨 등 4남매를 홀로 키운 아내 이용순(78)씨를 만났으나 아내 이씨의 얼굴이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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