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웬만한 건 숫자로 통한다. 숫자에 담긴 뜻을 모르고는 북한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온통 300뿐이야. ”

“머리에 20호 좀 없애지. ”

북한주민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아이들에게 정해진 배급량이 300g이어서 아이들은 ‘300’으로 통한다. ‘너는 600’, ‘나는 800’식으로 배급량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드러나기도 한다.

‘20호’란 머리카락이나 몸에 기생하는 이의 대명사다. 이 소탕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한다는 ‘내각결정 20호’에서 연유한 것이다.

병원도 숫자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제3’은 결핵을 뜻하고 ‘제3요양소’ ‘제3예방원’이라고 하면 결핵병원이다. ‘제2요양소’는 간염 전문병원이다.

다만 평양에 있는 제1, 제2, 제3병원은 전염병과는 관련이 없는 일반 종합병원이다. ‘49호’는 정신질환자, ‘49호 병원’은 정신병원이다. 1965년 발효된 정신질환자에 관한 ‘내각결정 49호’에서 연유한 숫자다. ‘11호병원’은 인민무력부 산하에 있는 군인과 직계가족을 위한 병원이다.

당이나 정부의 조직이나 업무에서 유래한 번호가 일상어로 통용되는 경우도 많다. ‘3호청사’는 대남 사업을 총괄하는 곳이고, ‘5과 사업’은 ‘특각 근무조’ 선발을 뜻한다. ‘6과사업’은 재일교포나 월북자를 관리하는 일, ‘11과’사업은 남파 공작원 가족을 관리하는 일이다. 최근 들어 유명해진 ‘39호실’은 노동당에서 외화를 관리하는 곳이고, ‘38호실’은 남북 경협을 다루는 곳이다.

북한주민들은 ‘정치범수용소‘라고 하면 몰라도 ‘몇호 관리소’라고 하면 금방 알아챈다. ‘15호’는 요덕, ‘22호’는 회령, ‘13호’는 온성, ‘14호’는 개천이다. 이 번호들은 수용소를 관할하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경비대 부대명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요덕의 경우 제2915군 부대 관할이라 끝의 두 숫자를 따 ‘15호’가 된다는 것이다. 일반 형사범이 수감되는 ‘교화소(교도소)’에도 일련번호가 있어 ‘88호교화소’ ‘66호교화소’ 등으로 불린다.

날짜에서 따 온 숫자도 많다. 자동차의 앞번호가 ‘216’이면 노동당 정치국원(후보위원 포함)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 차량이다. 김 위원장의 생일이 2월 16일이다. 능라도 ‘5·1경기장’은 1989년 5월 1일(노동절)에 준공됐다.

‘2·8문화회관’은 인민군창건일인 2월 8일을 기념해 붙였지만 78년부터 인민군창건일을 4월 25일로 바꾸면서 ‘4·25문화회관’으로 따라 바뀌었다. 서민들에게 필수적인 ‘8·3제품’은 공장의 가내작업반 등에서 만들어 일반에 공급하는 생필품인데 1984년 8월 3일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1호’는 김일성 김정일에 관한 것이다. ‘1호 편지’ ‘1호 도로’ ‘1호 작품’ ‘1호 행사’ 등이 일반에도 자주 쓰이는 용어다.

‘1호 기자’는 김 부자를 수행하는 기자이다. 8호, 9호 직장은 김일성 일가를 위해 농수축산물을 조달하는 작업장인데 이를 관리하는 곳이 중앙당 8국이다.

여기서 나오는 소출은 ‘1호 식품’이고, ‘965화물’에 실려 호위총국의 ‘1호 창고’에 비축된다. ‘1번 사건’은 김일성 김정일의 권위를 훼손하는 범죄, ‘9번 사건’은 김일성 가계에 대한 모독 범죄를 일컫는 말이다.

전쟁비축미를 보관하는 장소는 ‘2호 창고’, 비축 유류(유류)는 ‘10호 물자’, 전시용 의약품은 ‘10호 의약품’, 유사시 사용할 혈액은 ‘4호 물자’ 등으로 부른다. ‘제2경제’가 군수경제를 뜻하는 것임은 남쪽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숫자가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은 비밀과 보안을 중시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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