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平重

이번 1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적지 않다. 다채로운 독해법이 제시되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가 전무후무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위기 상황은 자초한 것이다.

보수를 자임하는 정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경제는 여전히 대기업 집단에 의해 좌우되며, 보수지를 자처하는 신문들이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점하는 현 상황에서 과연 보수주의의 위기를 운위할 수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 지표는 한국 보수가 맞닥뜨린 위기의 본질을 오히려 은폐한다. 왜냐하면 위기의 핵심은, 보수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급속히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의 입장을 우리 사회 공론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을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점차 상실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현대사는, 이른바 한국 보수주의의 이런 쇠락이 보수 기득권 집단 자신의 빈곤한 정체성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 사회의 보수가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왔지만, 그들의 실제 행태는 건강한 자유주의도 아니었으며 성숙한 민주주의로부터도 한참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수세력 안에 일제나 군사독재와 유착해 권력의 단맛만을 쫓았던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자유민주주의는 독립적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보수 기득권 세력은 시민들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왜곡해 악용하기 일쑤였다. 냉전반공 이데올로기, 절대적 시장 숭배,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관행 등이 어지럽게 섞여있는 한국 보수의 지형 속에서 일관된 합리적 이념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결국 한국 보수가 당면한 위기는, 자유민주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없는 데서 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재벌독점 경제의 폐해는 이미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만천하에 입증되었다. 극히 적은 소유지분만을 지닌 재벌 일가가 전체 기업집단을 좌지우지하는 관례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유습일 뿐이다.

정치 영역도 마찬가지다. 몇 년 만에 시행되는 선거를 한갖 형식으로 전락시킨 채, 일반 시민들로부터 유리된 프로 정치인 집단이 자신들만의 권력 게임에 몰두해온 것이 제도 정치의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을 결정지은 회오리바람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이런 제도정치 전반에 대한 중대 경고음인 것이다.

몇몇 보수 신문들도 중대한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겉으로는 공정성을 내세우면서도 자사(自社)의 이해관계와 사감(私感)에 근거한 편파보도의 의혹 앞에 노출됨으로써 정론지의 위상이 크게 균열되었다.

한국 보수의 의제를 만드는 주체가 주로 정치 집단과 언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보수임을 자처해 온 정당과 언론의 신뢰 하락은 결국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로 직결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의 앞날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열린 보수와 균형 잡힌 진보가 함께 어우러질 때 건강한 사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화와 절대빈곤이라는 과거의 기억은 한국 보수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규정했다. 민주주의와 풍요를 누리는 우리의 현재도 이런 과거와의 연계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했다. 따라서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껴안은 보수의 통찰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인 채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보수는 수구로 퇴행해 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보수는 결코 제대로 된 보수주의로 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한신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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