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燮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

어제까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대통령 선거전. 아직 민주화되지 않은 나라들에서 보면 엄청난 문화 충격이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국제적 비전이 실종된 선거전은 이전투구처럼 느껴지며, 배가 가라앉아도 “네가 죽는 모습은 보고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오월동주(吳越同舟)를 연상시킨다.

안에서 본 대한민국은 스피드 코리아, 디지털 코리아, 피스 코리아 등이 뒤엉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축제의 장이지만, 밖에서 본 대한민국의 앞날에는 시커먼 파도들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1880년 일본 방문을 마치고 풍전등화의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청나라 공사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전했다. 이 책에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防俄)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결탁하고(結日), 미국과 연대(聯美)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882년 연미(聯美)의 일환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청년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방아론의 영향을 받았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정작 청나라의 자리에는 친러 정부가 들어섰지만, 한반도의 남쪽이 소련 진영에 편입되지 않았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의 운명을 갈랐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위한 대한책략(大韓策略)은 무엇인가? 첫째, 승미(乘美). 황소의 등을 타고 12간지의 선두가 되었다는 쥐의 설화처럼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거인의 어깨를 타고 거인보다 더 멀리 바라보는 난쟁이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미국은 국가인 동시에 문명이다. 굳이 단수로서의 문명을 이야기한다면 미국은 그 상층부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다. 반미 감성이 반미 이성으로 굳어지면서 자칫 반문명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SOFA개정을 위한 한·미 협상은 반드시 그리고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통아(通俄). 이제 ‘조선책략’이 목표했던 방아론의 시대는 갔다. 러시아와의 인적·물적 교류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막 움터 오르던 러시아 열풍은 급속히 식어버렸다. 이것이 러시아에 대한 냉대로 이어지는 것은 위험하다. 러시아의 주가가 떨어졌을 때 그것을 사두라.

셋째, 존화(尊華). ‘조선책략’을 통해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했으면서 스스로는 러시아에 묶여버렸던 중국은 지금 상처받은 중화주의를 곱씹으며 무섭게 돌진하고 있다.

조선시대처럼 모화(慕華)사상에 찌들어서도 안 되겠지만, 영국·일본·러시아·미국 등으로부터 입은 중화주의의 상처에 앞장서서 소금을 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존화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중국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에 대한 동화(同化)를 거부하고 존경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결해(結海). 일본을 포함하여 바다를 통해 연결되는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호주나 칠레를 비롯한 태평양 국가들과 동남아(한국인들이 상습적으로 인종 차별을 하고 있는)가 포함된다. 중국은 세계를 목표로 삼고, 일본은 국제를 지향하는데 대한민국만 동북아를 고집해서는 결코 동북아의 허브가 될 수 없다.

동북아의 꽁무니가 될 수는 있어도. 끝으로, 지구(知歐). 지금 유럽에서는 4억5000만명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합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13억 중국 인구에 비해 1인당 소득이 월등히 높은 이들은 미국인들조차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문화적 수준을 자랑한다. 구한말 고종이 연미(聯美)를 추구했던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 청·일·러에 비해 초연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유럽이 미국의 대안이 될 수는 없어도 유럽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대통령 선거전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는 축제이며, 국민 스스로가 변화하는 동시에 미래의 통치자를 빚어내는 압축적 학습 과정이다. 이제 학습은 끝났다. 오늘 선택만이 남았다. 과연 21세기를 위한 대한책략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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