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金正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며칠 전 필자는 워싱턴에서 백악관과 국무부의 고위급 관리들을 만났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주한 미군’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예컨대 “얼마 전 한국의 통일안보팀 고위급 인사로부터 미국이 대북 문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반미 시위를 통해 미군 철수를 유도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후 북·미 협상 중 북한 관리들이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격 시위대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갈망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 국민들이 원한다면 필리핀에서처럼 철군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TV토론에 나온 몇몇 후보들은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고, 수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 추모 시위대에서도 미군 철수 주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북한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일관되게 주장해온 요구사항이자 소수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어온 사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 사이에는 한국전쟁,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미군이 철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모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난 50년간 미국의 지역 패권 유지와 한국의 안보 필요성이라는 대명제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사건·사고 속에서도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1990년 이전에는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또 일본의 보호와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은 태평양 지역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구(舊)소련이 해체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동북아의 이념적 기류가 새롭게 재편되고 무기체계의 발달로 인해 일본·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옛 에치슨 방위 라인을 채택할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지금 북한은 우라늄탄 개발에 이어 동결되었던 원자로를 재가동하겠다며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2개의 핵 카드로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에서 반미와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장기화할 경우 한·미 동맹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한·미 간의 문화, 법, 제도 차이로 야기되는 문제점은 논리적·합법적인 방법으로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성급한 대응으로 한·미 동맹 관계를 그르칠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가져올 수도 있다.

1992년 미군 철수에 성공한 필리핀의 경우 수천명의 필리핀 시민들이 마닐라 주재 미국대사관 앞에 모여 자주권을 주장하며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클린턴 미 행정부는 거센 반미시위, 화산폭발로 인한 자연재해, 탈냉전에 따른 전진배치 전략 축소 등을 고려해 기지를 철수했다.

92년 이후 필리핀의 국방력은 급격히 약화돼 51억달러 상당의 군현대화 계획도 경제난으로 도중 하차했다. 급기야 작년 11월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직접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군의 필리핀 재주둔을 요청했다. 필리핀의 사례는 미군 철수시 예상되는 국방비용, 지역 세력균형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지역 안보체제 구축과 같은 대내외적인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명분’이나 ‘당위’만 가지고 미군을 철수시켰을 경우 어떤 부작용이 예상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현 시점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북한의 위협에 대한 군사적인 위험뿐만 아니라 경제적 위험 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주한미군이 주는 심리적 안보 효과가 해외 자본과 국가 경제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을 차치하고라도 한국이 현재 수준의 국방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의 유지비용인 연간 30억달러와 수조원에 달하는 추가 무기 구입 비용 등의 경제적 부담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힘의 공백을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메울 것인가. 국가 안보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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