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함경북도 회령 제22호 정치범수용소의 위성사진이 공개되면서 인근에 함께 있다가 해체된 온성 제1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자행된 대학살사건에 대한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다.

사건은 1987년 5월 제12호 수용소 내 창평지구에서 발생한 북한 최초의 대규모 폭동사건이자 1만5000여명의 정치범 가운데 5000여명이 무참히 학살당한 최악의 사건이라고 증언자들은 밝히고 있다.

당시 인근 수용소에 경비병으로 입대했던 안명철(33)씨는 온성 제12호 수용소 폭동 진압작전에 참여한 소대장과 분대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전해들었다고 했다. 온성지구에 오랫동안 살았던 탈북자 문현일씨도 수용소가 해체된 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대학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들에 따르면 사건은 탄광에서 일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하다가 반항해 그를 때려 눕히면서 시작됐다. 현장에는 200여명의 정치범이 있었는데 흥분한 이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그와 함께 있던 보위원까지 죽인 후 산을 넘어 보위원 사택까지 습격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삶을 포기하며 살아가던 정치범 수천 명이 합세해 그 규모가 5000명을 넘게 됐고, 마침내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고 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제12호 수용소측은 인근 수용소 경비대 병력과 장비까지 동원해 고사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뒤 수용소를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사격해 폭동에 가담했던 5000여명 전원을 몰살시켜 버렸다고 한다. 폭동 진압 후 시신은 불태우거나 인근 야산에 집단 매장했으며, 보위원 가족과 희생자들은 인근 사월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국가안전보위부 정보원이었던 탈북자 김순철(가명)씨는 “당시 온성수용소에서 하루종일 총 소리가 울려 전쟁이 일어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곳 정치범 3분의 1 가량이 총맞아 죽고, 그 사건으로 수용소가 해체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생존자들은 다른 수용소로 분산, 수용됐다”고 전했다. 당시 요덕 제15호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기자도 1988년 말~1989년 초 요덕 관평역 보위부 관할 구역구 내에서 온성으로부터 이송돼온 1000여명의 정치범들을 직접 목격한 바 있다.

폭동이 일어났던 제12호 수용소 창평지구에는 현재 인민무력부 산하 ‘4.25 담배공장’이 들어서 인민군에 담배를 공급하는 집단농장으로 바뀌었다고 온성 출신의 탈북자들은 전했다./姜哲煥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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