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犀(이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의 공약이 연일 쏟아지고 있지만 올 한 해 국내외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탈북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접하기는 어렵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원론적이고 추상적 수준의 언급에 그치고 있다.

탈북자 문제는 현 정부의 햇볕정책 5년을 평가·반성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 나갈 다음 정부의 실력과 도덕성을 평가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문제는 한국의 외교적 위신과 관련돼 있다.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운동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미국·일본·유럽의 지식인들과 언론은 “도대체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탈북자 망명을 도와온 필자는 도리어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북한과 중국을 자극시키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몇 차례 들었다. 아마도 탈북자의 국내 입국을 도와온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국적 없이 떠돌던 탈북자들이 대거 외국공관에 뛰어들어 망명을 요청했던 올 한 해 한국 정부의 위신은 말할 수 없이 실추됐으며, 북한 주민들과 탈북자들의 인권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햇볕정책의 문제점도 여실히 드러났다. 제3국 탈북자 인권문제는 강제 북송하는 중국정부 못지않게 대한민국 정부의 부작위(不作爲)에도 중대한 책임이 있다. 외교적 중대사안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중국의 외국공관에 집단으로 들어가 망명을 요청하는 탈북자들의 기획망명이 연이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보낼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통로가 아니라 자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 상황에 놓였다면 이들 공관은 탈북자 유입을 막기 위해 경비를 강화했을지도 모른다.

동·서독 통일 전야의 대량 이주사태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83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은 매년 약 1만4600명, 84∼88년에는 4만명, 그리고 통일되던 해에는 34만3854명에 이르렀다. 대다수는 적십자사가 제공하는 천막에서 최초의 주거를 마련했다지만 이들은 서독의 동포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중국·러시아 등의 당사국들에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해 탈북자 망명을 돕기는커녕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와 사뭇 대조적이다. 그래서 입국도 하기 전에 한국에 대한 증오심부터 키우게 되는 탈북자가 적지 않다.

탈북자들의 국내 입국은 아직도 극단적으로 어렵기만 하다. 중개인을 통해 위조여권을 만들거나 외국공관의 담을 넘는 모험 외에 아직 마땅한 수단이 없다.

이미 입국한 탈북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정착지원금을 중국에 있는 탈북 가족이나 친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써버린다. 불법 중개인들을 양산하는 파행을 한국 정부가 방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탈북자 문제는 민족의 도덕성 문제 그 자체다. 독일은 억지로 통일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동독인민의 인권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시각에 입각해 정책을 추진해 결과적으로 통일을 일궈냈다. 우리도 사정은 같다. 문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개선시키는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 있는 여지가 아직 적다고 해도 탈북자문제는 이미 우리의 영역에 들어와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제3국에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탈북자들을 국내로 데리고 오고,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너끈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은 다음 정부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불꽃 튀는 정책 대결을 기대한다. /목사·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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