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불멸의 예술이라는 것을 정말 실감합니다. 36년 전 제 모습에 지금 목소리를 녹음해 넣는다니 기적같습니다. ”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한 녹음실. 검은 셔츠 하얀 재킷에 흰 베레모를 갸웃하게 쓴 영화 배우 최은희씨는 흑백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모습이다. 70 넘긴 나이를 읽을 수 없는 그가 64년 감독 데뷔작 영화 ‘민며느리’ 한 부분을 새로 녹음하고 있다.

그의 말 처럼, 그의 삶과 영화는 기적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60년대 신상옥 감독과 영화와 생활에서 좋은 짝을 이루며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숱한 명작을 남긴 그는 우리 영화사에 드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는 제작 당시 꽤 인기를 얻었지만, 그뒤로 우리 나라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민며느리’를 이번에 여성영화인 모임(대표 채윤희)가 발굴, 10일 오후6시 서대문 문화일보 홀에서 ‘여성영화인 축제’ 개막작으로 상영한다.

“화질도 좋고 다 잘 보존되어있는데 13분 정도 녹음테이프가 없어졌더군요. 그때는 후시 녹음으로 대사와 음악을 입혔는데, 원래 녹음을 했던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그 부분만 자막 처리할까 하다가 30년 후 부분 재녹음도 의미있겠다 싶어 후배들과 다시 녹음을 하게 됐습니다. ” 황정순 김희갑 박노식 서영춘 등 당대 최고 인기 배우들이 등장한 이 영화는 부잣집에 민며느리로 시집간 한 여성이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고 행복한 삶을 찾는다는 이야기.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정상을 구가할 때 만든 영화다. “신감독이 저를 적극 믿어주었습니다. 배우가, 더구나 여배우가 감독하는 게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누구 누구 덕’이라는 말 듣지 않으려고 촬영장 헌팅부터 밤샘 촬영까지 다 해냈지요. ”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배우’ 최은희는 전설의 한 부분이다. 1942년 식민지 조선에서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그는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남북한 양쪽 모두에서 화제작을 많이 남긴, 전무후무한 분단 체험을 가진 영화인이지만 정작 30대 이하에선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경험이 극히 드물다.

“영화를 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배우가 아니었다면 북한에 납치되었겠나, 그렇게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없인 제 삶도 없다는 것을 이젠 확신합니다. ” 78년 홍콩서 실종 후, 신상옥 감독과 함께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세간을 뒤흔들어 놓더니 86년에는 신감독과 함께 북한을 탈출, 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85년 북한에서 신상옥이 감독하고 그가 주연한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북한 탈출 후 미국에 오래 머물었고 ‘징기스 칸’ 등 힘 기울여온 영화 프로젝트가 좌절되는 경험도 여러번 겪었지만, 지금은 신감독과 함께 분당에 정착했다. “부산영화제, 전주영화제 등 영화제에도 참석하고, 영화 제작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징기스 칸’은 내년쯤엔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 같고, 다른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극단 신협 대표직을 맡은 그는 ‘징기스 칸’을 내년 말 쯤 대형 무대극으로 먼저 올리겠다고 밝혔다.

/박선이기자 sunnyp@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