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斗植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종종 “똑바로 쳐다봤더니(look in the eye)…”라는 말로 상대방을 평가하곤 한다. 상대의 눈 속을 꿰뚫듯 응시하는 ‘부시식(式) 관심법’인 셈이다. 세계 정상(頂上) 가운데 이 테스트를 통과한 인물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다.

고이즈미 경제개혁에 관한 비난이 쏟아져도 부시는 “그의 눈에서 개혁의지를 발견했다”고 일축한다. 전직 소련스파이 출신인 푸틴에 대해서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믿을 만한 친구로 여기게 됐다”는 대답이다.

일단 부시 ‘관심법’을 통과하면 그 나라의 세상살이는 무척 편해진다. 로마제국 시절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지금은 미국으로 통하는 시대다.

군사력 하나만 봐도 세계 군비(軍費)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유일의 초강국인 미국의 대통령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한 나라의 진로와 직결된 중대사안이다. 그렇기에 세계 지도자들이 미국 대통령과 친교(親交)를 갖길 원하고, ‘부시 다루기’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다.

고이즈미와 푸틴은 이런 처세술을 일찍 깨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부시 행정부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는 방북(訪北)을 결행했고, 러시아는 아예 북한과 함께 ‘악의 축(軸)’으로 지목된 이란과 대규모 원자력 협력 사업을 추진해 미국의 분노를 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지(紙)가 최근 “정상 간의 우정이 모든 문제를 덮어줄 수는 없다”며 부시의 러시아 정책을 비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부시 다루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자칫하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처럼 ‘미국의 푸들’이라는 조롱거리가 되거나, 국내 선거 때문에 ‘반미(反美)’ 태도를 보이다 앞으로 치를 대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슈뢰더 독일 총리 같은 딱한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시 다루기’도 실패 사례다. 고이즈미와 푸틴이 작년 9·11 테러 직후 부시에게 가장 먼저 위로전화를 걸어 ‘어려울 때 도움 주는 친구’라는 성과를 올린 반면, 김 대통령은 위로 전문(電文)으로 대신했다. 한 외교관은 “김 대통령은 부시를 만나면 늘 어색해하고 긴장했다”며 “끝내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했다”고 전했다.

누구보다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잘 아는 김 대통령이 왜 그랬을까. 그 답은 김 대통령 주변 인사들 머릿속에 가득한 ‘부시와 공화당=대북 강경파’라는 도식(stereotype)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정형화된 사고(思考)로 보면 부시는 처음부터 ‘불편한 존재’일 뿐, 함께 일할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이를 더욱 부채질한 것이 국내의 ‘반(反)부시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북한 핵문제 등 한반도 위기의 원인을 부시와 공화당 강경파로 돌렸고 부시, 체니 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을 ‘악(惡)’으로 간주했다. 정부 고위인사들이 펴는 ‘파월 국무장관 동정론’도 같은 뿌리다.

하지만 미국 강·온파의 대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북한의 비밀 핵개발은 제네바 합의 위반인 이상, 북한이 먼저 ‘핵포기’ 조치를 취하는 게 순서라는 데는 강·온의 구별이 없다.

다만 대화와 압박의 시기·강도를 둘러싼 방법상의 논란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파월 같은 ‘온건파’가 득세하면 햇볕정책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한 미국 전문가는 “대북협상 창구를 맡고 있는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만약 자신이 한국식 온건파로 분류되는 것을 안다면 무척 억울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네기재단의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에는 바깥 세상에서 생각하는 식의 ‘일방주의’와 ‘다자주의’는 없다”며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제거라는 목표는 같다. 다만 유엔 안보리와 독자행동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 하는 논쟁일 뿐, 외부에서 생각하는 엄청난 철학적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제 한 달쯤 뒤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는 ‘부시 다루기’라는 세계적 고민에 동참하게 된다. 그가 부시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진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 내부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미국관(觀)부터 털어내는 게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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