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勝俊

때는 1971년 10월 22일 오후 4시15분부터 오후 8시28분까지였다. 장소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회당이었다. 마주 앉은 사람은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안보담당보좌관이었고,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 아래의 총리였다. 나중에 세계를 주무른 외교전략가로 평가받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두 사람이 이날 4시간 넘게 마주앉아 주고받은 이야기의 절반 가량은 한반도 문제였다.

원래 백악관 1급비밀(Top Secret)이었다가 30년 만인 작년 4월에 비밀해제되고, 조지 워싱턴대학 부설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란 민영기관이 지난 5월에 최초로 인쇄작업을 했다는 자료철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 가지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정리를 해봅시다. 언젠가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서 철수할 때 미국은 일본 자위대 군사력이 한반도 남쪽에 진입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셨죠?”(周恩來)

“맞습니다.”(키신저)

“두번째로 미국은 결국 한국에서 철수할 것이며, 그 이전에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쪽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셨죠?”

“정확하게 합시다. 공개되지 않은 비밀인데, 우리의 현재 계획은 내년(1972년)에 주한미군의 상당 부분(substantial percentage)을 철수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법적지위를 인정하겠다고 하셨죠?”

“그건 복잡한 얘긴데….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한 것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화해를 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해 7월에 시작된 키신저의 중국 비밀방문은 두 나라 외교관계 수립으로 이어졌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는 세계전략 전환의 일환으로 서로 잘 지내기로 하고, 그러기 위해 4시간이 넘는 두 번째 준비회담을 하는 동안 절반가량을 한반도 문제에 관한 의견조율을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두 전략가는 “목표가 한반도의 안정과 전쟁위험 감소, 그리고 (러시아·일본 등) 다른 힘의 한반도 개입 방지라는 전제 아래서 중국과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이익은 서로 공존(parallel)할 수 있다”는 데 비밀합의한다.

물론 상황은 이미 흘러간 상황이다. 현재 한반도에서는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가 재단(裁斷)하던 상황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당시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에 대한 보복을 벼르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주도하던 강병(强兵)정책도 지금은 없고, 거꾸로 북한에 의한 핵무기 개발 위협이 한국과 미국을 머리 아프게 만들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은 이미 수교까지 해서 날로 경제교류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30년 만에 비밀해제된 키신저-저우언라이 대화록은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너무나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고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가 3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의 배타적인 이익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마주앉아 한반도 상황을 마음대로 재단할 가능성이 언제든 있다는 사실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지 워싱턴 대학 도서관에서 키신저-저우언라이 대화록을 읽는 동안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다소 줄어든 요즘 미국과 중국의 관계와 움직임은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새롭고도 절실한 화두(話頭)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싱턴에서)/전문기자 sj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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