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북한에서도 제1외국어다. 60년대까지는 러시아어가 7대 3 정도로 영어를 압도했지만 70년대 들어 비동맹권 국가와의 외교가 중요해지면서 영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외화벌이, 최근 들어서는 UN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와 외교가 확대되면서 영어의 중요성은 한층 커지고 있다.

북한의 영어는 철자나 발음 등에서 철저히 영국식이다. ‘노동’은 미국식인 ‘labor’ 대신 ‘labour’로 표기하고, Tom은 ‘탐’이 아니라 ‘톰’으로 읽는 식이다. 영국 정부는 98년 2명의 북한 영어교사를 초청, 6주간 여름학기 과정을 이수케 한 적이 있다. 올해 9월 말에는 3명의 영국인이 북한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게 됐다. 이들은 북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최초의 서양인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달 북한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에게 영어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동안 비동맹국가와 동구권 국가에 외교관계가 편중돼 있었기 때문에 영어 유학길은 막혀 있었다. 70년대 말 남미 가이아나 대통령이 수 명의 국비유학생들을 초청해 일부 영어유학이 가능하기도 했다. 이때 뽑혀 유학한 리혁철은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국제관계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당 국제부 지도원으로서 김정일의 ‘1호 통역사’를 맡고 있다. 장일훈, 김명길 등의 외무성 관리들도 가이아나 유학 출신이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외국어대학, 국제관계대학 등 영어 관련 명문대학 학생들에게는 미국영화를 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져 왔다.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한 ‘메리 포핀스’를 비롯하여 ‘왕자와 거지’ ‘목격자’ 등의 영화가 회화교재로 쓰였기 때문이다.

남포항의 ‘선원 구락부(구락부)’도 좋은 회화 실습장이다. 현지인들에게는 금지구역이고, 외국선원들도 이곳을 벗어나서 주민과 접촉할 수 없지만 이들 학생들은 대학 4학년이나 5학년이 되면 한 달 이상 외국인 선원들과 함께 지내며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인도, 파키스탄, 싱가포르 등의 선원이 대부분이고 가끔 영국인 선원을 만날 수도 있다. 학생들에게는 정통 발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로 영국인이 단연 최고 인기다. 자유로운 이들 선원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북한체제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외국어 관련 명문대 학생들은 고위층 자녀가 많다. 특수계층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올브라이트 장관 일행을 맞았던 관리들 중 최선희 외무성 연구원은 중앙검찰소 소장(검찰총장 격) 최영림의 양녀다. 평양, 신의주 등에 있는 외국어학원에서는 고등중학교 6년 과정을 외국어 학습에 주력한다. 한국의 외국어고등학교와 비슷하다. 여기에도 고위층 자녀들이 주로 입학한다.

영어 수학을 못하면 좋은 대학 가기 어려운 것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다. 인민학교(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수업이 시작되고, 고등중학교부터는 주 3회로 배정돼 있다. 그러나 특별한 참고 서적이 없어 교과서를 암기하는 수준이다. 영어테이프를 구해서 듣는 경우도 있다. 회화교육이 강조되고 교사의 성공사례를 발굴하여 포상하기도 하지만 현실적 한계가 크다. 사전은 3만 단어 정도가 수록된 영조(영조)사전을 주로 이용한다. 한국에서 들어온 영한사전도 종종 이용하는데 표지를 바꿔 쓴다. 발각된다고 해도 크게 벌을 받지는 않는다. 올 6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영문학부 교수진이 영조 전자사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조선중앙TV의 보도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좀더 폭넓은 영어공부의 길이 열린다. 청각 실습실도 이용할 수 있고, 영국에서 나온 ‘901문장 시리즈’도 좋은 교재다. 이과 계통의 수재들은 어려운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과학잡지 ‘네이처(Nature)’나 ‘사이언스(Science)’를 복사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잡지를 토대로 ‘과학영어’라는 교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평양외국어대학의 경우 영어학부에 가장 많은 인원이 배정돼 있다. 다른 언어 전공자들도 영어는 필수적으로 들어야 한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노동당 국제부나 외무성에 진출한다. 그러나 그밖의 학생들은 교사나 외화벌이 기업소가 아니면 진출할 곳이 많지 않아 사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대동강 보트요원으로 배치받는 등 전공을 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98년 7월부터 99년 6월까지 실시된 토플(TOEFL) 시험에서 한국은 6만1067명(평균 535점)이 응시한 반면 북한은 336명이 응시했다. 북한의 평균 성적도 아시아 21개국 중 16위(510점)로 하위에 처져 있다.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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