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통일부장관이 엊그제 미국 뉴욕에서 가진 한 연설에서 “북한이 우리와 함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모색함으로써 남북이 공존 공영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남·북한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체제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언급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 같은 정부에 속한 외교부 대변인의 반박 성명까지 들을 만큼 ‘햇볕 전도사’를 자임했던 정 장관이 갑자기 북한의 ‘체제 변화 필요성’을 언급하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같은 언급이 정부 내 의견 조율을 거친 것인지, 아니면 정 장관이 그간 감춰온 소신을 불쑥 털어놓은 건지 궁금할 뿐이다.
만약 정 장관 개인 생각이라면 현 정부 고위 인사들의 임기 말 기강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부 공식 입장이라면 하루 아침에 느닷없이 ‘체제 변화’를 언급하는 배경이 대체 무엇인가?

이처럼 한국 정부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와중에도 미국의 대북 핵 포기 압박 외교는 정해진 단계를 차례차례 밟아가고 있다. 지난 주말 부시 미국 대통령의 특별성명에 이어 파월 국무장관까지 엊그제 “미국은 북한을 위협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다”고 공개 천명했다.

북한이 비밀 핵 개발의 이유로 ‘미국의 대북(對北) 적대정책’을 들면서 그 포기를 요구해온 것에 대해 미국 정부 최고위급 인사들이 육성으로 직접 대답한 셈이다.

물론 북한의 주장은 처음부터 앞뒤가 맞질 않고, 미국 정부도 이같은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계속 핵 포기 요구를 거부할 ‘명분’들을 하나씩 없애고 있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이다. 이젠 북한이 핵 포기를 하지 않을 이유나 명분도 없어졌고, 또 마냥 늦출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

당장 다음 달부터 중유 공급도 끊기고, ‘DJ정부 햇볕 전도사’마저 북의 ‘체제 변화 필요성’을 언급하는 마당에 무엇을 더 미룬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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