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普植
/사회부 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김수영(金洙暎)의 시에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던 것에 분개하고…’라는 구절이 있다. 정말 분개해야 할 대의명분 앞에서는 가만히 있고, 일상(日常)에서 쩨쩨하게 5원, 10원 잔돈푼이나 따지는 자신이 싫었던 모양이다. 쩨쩨함의 절정(絶頂)은 시일이 흘렀는데도 그런 잔돈푼을 잊지 않은 채 머릿속에 담아두는 데 있다.

이제 몇몇 담대한 세인의 기억에는 멀어졌을 테지만, 현대전자(하이닉스)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 중동의 유령회사를 통해 송금한 1억달러의 증발 사건이 드러난 적 있다. 당시 출근길에 불현듯 기자는 집안 어딘가 처박혀 있을 현대전자의 주식을 떠올렸다. 그동안 있는 듯 없는 듯 버려둔 주식이 갑자기 대단하게 보인 것이다.

지난 99년쯤 2만3000원에 구입한 120주. 당시 액수로 따져도 300만원이 채 안 된다. 현재는 주당 500원이다. 반도체 D램 시장의 공급과잉 등 여러 주가하락 요인은 충분히 이해될 만했다.
쩨쩨함이 두뇌의 논리작용을 비트는 것일까. 현대전자의 1억달러 증발 사건이 터진 뒤로 주가하락의 전말(顚末)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40만명의 소액 주주도 그런 심리 변화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현 정부의 대북(對北) 퍼주기 논란이 벌어졌을 때, 다수 국민들은 결코 인색하게 비치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외된 정부에 대해 마음 한쪽에는 일종의 연민도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가면 인심은 변할 테고 현 정부의 평가도 달라질지 모르지 않는가.

이러한, 쌓아온 균형 감각이 재(財)테크를 위한 주식 몇 장에 흔들리게 된 것이다. 아직 현대전자의 1억달러 증발이 단순히 내부 횡령에 의한 것인지,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으로 건너간 뇌물(賂物)인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현대측은 횡령으로 슬쩍 운을 뗐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1970년대 초 그 유명한 록히드 항공사의 뇌물 스캔들이 터지자, 록히드측은 “거래 장부에 뇌물이란 항목은 없고 그 돈은 거래처 직원이 횡령한 것”이라고 했다. 뇌물을 주고 탄로나도 ‘선물’을 줬다고 답변하는 게 뇌물의 법칙이다.

바로 직전에 터진 현대상선의 4억달러 증발 사건도 비슷하다. 다행히 기자에겐 현대상선의 주식은 없다. 하지만 산업은행에서 그 돈을 빌려줬다. 산업은행의 돈은 어디서 온 것인가. 국민 세금을 모아놓은 것이다. 절차가 복잡해 피부에 닿는 절실함이 덜 했을지 모르나, 우리의 세금도 포함된 게 틀림없다.

혹자는 설령 그 돈이 음지에서 뇌물로 쓰여졌더라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돼 남북관계 개선의 공(功)이 있다고 주장한다. 취대사소(取大捨小)라! 국민 일인당 몇 푼씩만 더 내면 채워질 돈을 그렇게 따지는가라고 우리의 쩨쩨함을 나무랄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검증되지 않은 대의명분에 일상의 조그만 푼돈을 쉽게 양보할 마음이 없다.

하기야 그 돈도 은밀하게 북한에 있는 누구의 비자금이 됐다는 물증은 없다. 명쾌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외적으로 분명한 게 있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현 정부는 그걸 풀어보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뿐이다. 호통을 주고받던 국회의원들의 마음도 대선(大選)의 콩밭으로 갔다. 그러나 쩨쩨한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우리 자신의 푼돈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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