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대기업이 국책은행에서 빌려간 4000억원이 온데간데 없이 행방불명인데도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다.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 아들의 병역문제를 둘러싼 테이프가 조작인 것으로 검찰이 결론내렸는데도 정작 테이프를 조작했다는 김대업이라는 사람은 버젓이 온존하고 있다.

온갖 거짓말과 조작과 음해와 비리가 판을 쳐도 그저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묻혀버리거나 덮어버리는 사회, “너희들은 몰라도 돼” “알려고 하면 다쳐” 하는 세상-그런 세상에서는 국민은 그야말로 쫄병신세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명색이 OECD국가라면서, 선진 진입을 노리는 나라라면서, 뭐니뭐니 해도 현직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은 나라라면서, 그리고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를 온갖 파렴치한 방법으로 찾아내고 추적해서 개인을 파괴하는 데 이골이 난 정보사찰 만능국가인 처지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짜고 친 것 같은 「4000억원짜리 고스톱」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떻게 없는 듯이 덮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돈이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김정일에게 갔다는 것을 의심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국민은 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데 당국은 쓰다 달다 말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전주(錢主)는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사방에서 손가락질하는데도 입 딱 다물고 못 들은 체 하고 있을 청와대가 아니다.

「누명」이라면 누명을 쓰고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나라를 두쪽으로 갈라 편싸움시켜 어부지리를 보는 수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언론과 야당을 고소(告訴)를 했어도 수십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도 조용하고 금감원도 조용하고 검찰도 조용하고 이제는 야당도 조용하다. 그래서인지 언론도 조용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돈의 행방을 밝힐 수 없는 무슨 사연(事緣)이 있을 것이다. 돈을 받은 쪽에서 사실을 밝히면 그간의 거래와 「업적」에 금이 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위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내거래에서도 그렇지만 돈을 준 사람이 받은 사람을 밝히는 것은 정치적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받은 쪽이 달라는 요구를 안했다고 버티면 준 쪽만 초라해질 수도 있다.

현 정권쪽의 사정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의 공세부재(不在)는 괴이쩍기 짝이 없다. 마치 DJ쪽과 무슨 교감이라도 있는 듯 더 이상 추궁이 없다. 그것이 야당으로서 할 일인가? 더구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말이다.

혹시나 북측의 심사를 건드려 자기들 집권 이후에 대북접촉 내지 거래에 어떤 지장이 있을까 지레 알아서 처신하는 측면은 없는 것일까? 아마도 한나라당을 포함한 대통령 후보들이 입 다물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하기야 이회창씨도 자신이 주도한 일도 아닌데 그것으로 대북 거래창구가 닫힐 수도 있는 일에 앞장 설 생각이 없을지 모른다. 노무현씨는 주는 것을 찬성하는 쪽일테고 정몽준씨는 돈 꿔다 갖다 준 장본인 겸 하수인 기업의 연관자다. 받은 쪽을 곤란하게 할 처지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만일 4000억원이 DJ의 승인 또는 묵인 아래 북쪽에 간 것이 임기가 끝난 후에 뒤늦게 사실로 드러나면 그가 일편단심 그려낸 남북화해의 「그림」은 크게 먹칠을 당할 것이고 그의 「햇볕」 업적은 적지 않게 평가절하될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도 김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전에는 곤란하다면 적어도 선거 후 임기만료 전에 이 문제에 관한 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실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어려웠던 입장」을 설명해 국민의 이해를 얻어내고 다음 정권에 주는 부담도 덜어주는 것이 현직 대통령다운 태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라꼴을 구제해야 한다. 한 나라가, 그래도 자존심을 갖고 살아가는 한 국민이 4000억원이 어디로 가든 몰라도 되고 덮어씌워도 눈감고 넘어가는, 한심한 처지로 몰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간 정치권에는 많은 거짓말이 있었다. 속고 속이고, 모함하고 인격살해하는 저질정치가 횡행해왔다. 4000억원의 행방조차 알 수도 없고 밝혀낼 수도 없는 국민의 허탈감과 무기력, 그것을 감추려는 권력의 속임수와 속셈은 이제 극에 달했다. 이것 하나라도 풀리면 응어리의 반은 풀린다./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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