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의사들은 누구보다 바쁘고 고달프다. 찾아 오는 환자를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의사 구역 담당제’에 따라 주민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건강상태를 미리미리 챙겨야 한다. 그러나 약은 턱없이 부족하고, 의료 기기는 낡을 대로 낡았다. 의사들이 약초를 캐러 산을 뒤적여야 하고, 자신의 피를 환자에게 뽑아 주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의사 한 사람이 5~6개 인민반(200~300명)을 맡아 예방 치료를 하게 된다. 왕진 주치의인 셈이다. 북한은 중대한 정치적 사변이 있을 때마다 ‘완전하고도 전반적인 무상의료시스템’을 건설할 것을 주창해 왔다. 군중을 장악하는 강력한 힘이 ‘무상치료’, ‘무상교육’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상치료’를 달성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무의촌을 없애고, 각 리 단위까지 진료소를 갖추었다. 전국에 7300여 진료소와 40여 개의 종합병원이 있다. 그러나 비용이 과다하게 들자 병원을 짓는 대신 의사들이 직접 왕진을 하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담당의사가 인민반 중 한 집을 골라 ‘위생초소’로 삼고, 주민들이 여기에다 어디가 아프다는 쪽지를 보내두면 의사가 매일 아침 검토하여 진료에 나서게 된다. 주민 전원이 주치의를 갖는 셈이다. 꾀병도 많다. 직장에 결근할 경우 진단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담당의사는 알아 채고 허위진단서를 떼주는 대신 처방약은 자신이 챙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생긴 약은 장마당으로 나간다. 장마당에는 중국산 의약품들이 많지만 북한 병원에서 빼돌려진 약도 적지 않다. 환자들은 장마당에서 약을 구해 의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북한 의사들은 희생정신이 강해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환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피를 수혈하고, 때로는 넙적 다리의 피부를 떼내 이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신의주에서 의사를 했던 최동성(50)씨는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이라 수혈을 자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워진 경제는 의사들의 희생정신도 흔들어 놓았다. 요즘은 의사들도 뇌물을 많이 받는 직업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반적 무상치료제’, ‘의사담당구역제’, ‘예방의학적 방침’을 헌법에 명시해 두었지만 80년대 중반 동구권에서조차 의약품 수입이 어려워지고부터 북한 의료체계는 붕괴의 과정에 들어섰다. 86년 500kg의 항생제를 주겠다던 불가리아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70kg을 공급해 주었던 루마니아도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 최고의 평양의학대학부속병원에도 오래전에 멈춰버린 기기들이 즐비하고, 면봉도 소독해 써야 할 만큼 물품이 부족하다. 전기부족으로 정밀 수술에 필요한 조명도 제대로 켤 수 없다. 재작년 북한에서 철수한 국경없는 의사회는 “북한의 의사들이 걸레같이 불결한 천으로 환자들의 환부를 닦아주고 있었으며 정맥주사액이 부족해 설탕과 물을 섞어 주사를 놓는 실정”이라고 상황을 묘사했다.

의사가 약초 캐기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방의 진료소에서 평양의 중앙병원 의사까지 예외가 없다. 그래서 북한의 의사는 손이 거칠고 손마디가 몹시 굵다. 캐 온 약초는 한약재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양방식 캡슐이나 알약으로도 만든다. 북한 의약품의 70%는 이렇게 충당된다.

의사들에게 할당된 외화벌이도 만만치 않다. 한 사람이 1년에 18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여야 한다. 실질 가치로 따져 1년치 월급과 맞먹는 액수다. 의사들이 금광에 가서 금을 캐거나, 잔디씨를 모으거나, 메뚜기나 갯지렁이를 잡아 외화를 번다.

북한 의사는 양의라도 한방(동의학) 의술과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고,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승급할 수 없다. 내과의사였던 김지운(64)씨는 “청진기 하나로 웬만한 병은 진단해낼 수 있을 정도로 수련을 받는다. 약도 없고 기구도 없는 전시(전시)라면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사고하면서 수련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제난으로 무너진 의료 체계 속에서도 그나마 의사들의 실력과 희생정신이 북한 인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김미영 객원기자 miyoung@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