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허시

지난 23일 해질 무렵 나를 포함한 보도진은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안내됐다. 경기장은 10만이 넘는 북한 주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운동장에는 수만명이 밝은 원색 운동복에 붉은 깃발을 들고 줄 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조용해서 마치 영화 촬영세트 속의 부속품이란 느낌이 들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몇분 뒤 마오쩌둥복을 입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함께 등장하자, 확성기에서 ‘위대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퍼졌고, 군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운동장에서 ‘매스게임’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앞쪽으로 밀려나와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했다. 잠시 후 마치 주(주) 전원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한 순간에 노래와 환호가 멈췄고 조명도 어두워졌다.

약 1시간 동안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혁명역사 55년’을 주제로 한 매스게임을 펼쳤는데 그 일치된 동작은 놀라울 정도였다. 7~8세 정도되고 뺨이 붉은 작은 소녀들이 ‘지도자 동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내 조국은 노동당 태양아래’ 등의 노래에 맞추어 재주넘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맞은 편에서는 ‘카드섹션’이 연출됐다. 5만명이 한 사람의 지휘에 맞춰 거대한 파도와 천둥을 보여주기도 하고, 트랙터로 땅을 일구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일성이 생전에 방문했던 54개 공산국가가 표시된 지도도 표현됐다.

다음날 나는 두 번이나 ‘규칙위반’을 했다. 오전에 동료와 함께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공원과 기차역쪽으로 걸어 나갔을 때였다. 공원엔 잔디가 깔려있지 않았고 기차역 관리인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평양시내를 걷고 있는 동안 감시의 눈길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 우리가 골목길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북한측 ‘감시원’이었다. 그는 29세이고 리(이)씨라고 했다. 감시원은 우리에게 “위험하다. 북한인민이 미국인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르느냐”고 말했다. 내가 “우리에게 신체적인 위협을 가한다는 말이냐”고 묻자, “농담이었다”며 “당신들은 올브라이트를 취재하러 왔으니 그것만 해야한다”고 둘러댔다.

또다른 규칙위반은, 길 모퉁이에 있는 국영백화점 구경을 나간 것이다. 역시 ‘감시원’은 우리를 따라오면서 계속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쇼핑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감시원도 더 이상 제지하지 않고 따라오기만 했다. 백화점은 축축하고 어두운 사회주의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상품은 모두 북한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매우 낡은 소비에트식 물건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사줄 장난감을 찾아봤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조악하게 만들어진 플라스틱제 버스와 배를 하나씩 샀다.

그 다음엔 웅장한 ‘김일성’ 기념물들을 보기 위해 시내관광을 가게 됐다. 30m가 넘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동상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인민을 향해 자비로운 손길을 뻗치고 있는 김일성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동료기자 한 사람이 부탁했다. 적절한 위치를 잡기 위해 동료기자에게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일 것을 지시하던 중 일본인 기자 한 사람이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주변의 북한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다그치면서 우리들을 마구 내쫓았다. /정리=금원섭기자 capedm@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