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鎭雨
/계명대 교수ㆍ철학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들 중에는 자신에게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금방 부정적 의미로 탈바꿈하는 것들이 있다. ‘진보’와 ‘보수’가 그것이다.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역동적 입장이 진보적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가치와 상태를 유지하려는 정태적 태도가 본래 보수적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수직적인 군사문화, 폐쇄적 민족주의 등과 같은 비민주적 요소들을 비판하는 태도가 대체로 진보로 이해된다면, 이러한 비민주적 관계는 비판하면서도 이 관계를 밑받침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치관’, ‘사회안정’, ‘애국심’등을 옹호하는 것은 분명 보수적이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비전으로 전국민을 동원하였던 개발독재시대에는 진보와 보수가 비교적 간단하게 갈라졌다. 온갖 형태의 인권유린과 권위주의적 억압이 자행되는 개발의 음지를 햇볕에 드러내자는 ‘민주적’ 태도가 진보였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비민주적 현상을 당분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기득권세력의 ‘반민주적’ 태도가 보수였다.

최근, 이러한 이념의 전선은 ‘통일’ 문제를 계기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엉클어지고 있다. 민주의 이념이 여전히 진보와 보수를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포애로써 껴안아야 할 북한의 인권문제를 비판하면 금세 통일을 거부하는 보수 세력으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반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절대적 ‘민족 이익’을 위해서는 북한의 비민주적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마법상자를 거치면, 이처럼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비민주성을 괄호 안에 넣어두자는 비민주적 태도가 오히려 진보가 되고 민주적 가치는 어떤 이유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민주적 입장이 보수로 변질된다. 스스로를 진보적 또는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확인 당하면 상처를 입고 모욕을 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념적 도착현상을 치유하는 길은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통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처럼 통일은 분명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민족적 핵심정서이다. 이산가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과 북이 만나는 곳에는 항상 눈물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단순한 감정적 유대에서 기인하든 아니면 통일 이후의 미래사회에 대한 냉철한 기대에서 기인하든, ‘통일정서’는 민족적 유대의 밑거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통일정서는 비민주적인 북한정권을 비판할지언정 결코 북한동포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반면, ‘통일지상주의’는 통일만이 분단에서 비롯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넘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문화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통일은 외세의 영향 없이 우리끼리 독립적으로 이룩하자는 말이 그렇고, 북한의 인권을 거론하기보다는 남북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렇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것이 ‘진보’이고, 민족보다 ‘민주’를 강조하는 입장이 보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통일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념적 뒤틀림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하나는 진보의 원천인 ‘민주’로 돌아가는 길이다. 민주의 물음은 지극히 간단하다. 우리는 북한동포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런 체제하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우리 사회와는 설령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북한 사회 자체가 민주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북한 주민을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북한민주화의 최선과제라면, 남한의 ‘햇볕’은 북한의 특권층이 아니라 음지에서 시달리는 동포를 따뜻하게 해야한다. 민주만이 통일의 길이라고 믿는 ‘건강한 보수주의’가 민족적 통일정서를 인정하고 북한의 음지를 비춰줄 구체적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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