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南北>
楊相勳
/정치부 차장 jhyang@chosun.com

국가에선 국익을 위해 선악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 나라 최고 정보기관이 그렇다.
미국 CIA, 독일 BND, 프랑스 DGSE, 영국 MI6, 이스라엘 모사드 등의 정보기관들이 2차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암살·간첩·반란·역선전·선동 등의 공작을 펼쳐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은 제3국에서 적국의 요인을 화학무기로 암살하려 시도한 적도 있다. 실패해 음모가 노출됐지만 이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이 공작을 하는 것은 그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였다. 거친 현실의 세계에서 한 국가가 생존하고 이익을 지키기 위해선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이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3D(difficult·어렵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한) 중에서도 극(極)을 달리는 일들이다.

이런 국가적 3D업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 국가정보기관의 스파이들이다. 그들이 겪는 3D는 목숨까지 요구한다. 미국 CIA 본부 건물의 한 벽은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요원들의 사진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역할을 맡은 곳이 국가정보원이다. 그런데 그들은 3D가 아닌 3P(president·대통령에 아부하고, politics·정치를 하거나 줄을 서고, power·힘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가정보원 초대 이종찬(李鍾贊) 원장이 관훈토론회에 나왔다. 스파이 총책이 언론인클럽의 토론회에 주인공으로 참석한 것은 주요국에선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1996년까지 책임자의 이름 자체를 비밀로 했다. 이씨는 정치인 출신으로서 정치를 한 것이라고밖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씨는 최근 어느 TV에 나와 “나 같은 정치인이 국정원장이 된 것부터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다음 천용택(千容宅) 원장은 기자들 수십명과 밥을 먹다가 대통령 정치자금 얘기를 발설해 경질됐다. 그러더니 그 대통령이 다시 천씨를 공천해 국회의원이 됐다. 이런 일도 주요국에선 거의 없는 일이다.

그 다음 임동원(林東源) 원장은 국가정보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스파이 총책이 대통령이 하는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리면서 제주도에 간 북한의 대남공작 간부를 비서처럼 수행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스파이 간부들도 드물지만 비밀협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통령의 업적을 위해 나선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관광지에서 공개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임씨의 원장 재임 시절 국정원의 고위 간부들이 각종 비리와 ‘게이트’에 연루된 것은 국정원장이 본연의 임무와는 동떨어진 일을 벌이면서 내부 기강이 와해된 결과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현직 신건(辛建) 원장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이 말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청을 주장한 야당을 비난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며 화를 냈다. 기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말이다. 은밀성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의 총책이 이렇게 장시간 자신을 언론에 노출시키고, 감정을 드러내면서 말을 쏟아내는 것 등은 정보선진국의 기준에서 보면 하나의 희극이다.

국정원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도청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국가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도청’이 의혹이 되고 분노를 사는 것은 그것이 국가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3D업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 하는 3P업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그런 의심을 살 일이 그동안 너무나 많았다. 과거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국정원에는 국가적 3D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요원들이 있다. 그들의 활약으로 지난 3년간 5차례나 구체적인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 기도를 포착했다. 그런데 국정원장은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모두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냄새를 풍긴다. 대통령이나 쳐다보는 3P 국정원이라면 국가에 득은커녕 해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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